외국여행

65세의 젊은이가 중동과 동유럽을 헤매다<62> 보스니아 1.

어르신네 2006. 11. 5. 13:27
 


사라예보

2005년 12월 14일 (수) 흐림

새벽 6시 되기 전에 사라예보에 내렸다. 삐끼가 나타났다. 말이 많은 아주머니이다. 이거 속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려고 했던 여관은 시내 중심지역인데, 그 반대방향으로 가면서 자기가 운영하는 민박집이 싸고 괜찮다는 것이었다. 2인실인데 단조롭고 아주 작은 방이다. 1박 10유로이니 한 이틀 밤은 지낼 만하다.


지난 밤 버스에서 제대로 자지 못한 잠을 보충하려고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그래서 10시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시내 구경을 나갔다.

주인 여자가 시내를 안내하면서 전차비와 점심 값 군것질까지 모두 내가 떠맡았다. 두 사람이 쓰는 돈이 많이 들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친절하게 해 주니까 그 정도는 써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번에는 저녁과 아침 식사를 위한 장보기할 돈을 내란다. 자기 집 부근에는 식당이 없기 때문에 자기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가지를 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지 않았다. 하여튼 오늘만 지내보고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일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다.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며 문화 중심지이며 트레베비치 산기슭을 흐르는 밀랴츠카 강의 좁은 골짜기에 있다. 이 도시는 이슬람교적 특성이 강한 많은 모스크를 비롯해 내부가 장식된 목조주택들과 옛 투르크인들의 장터가 있고 시민의 거의 절반이 이슬람교도’라고 한다


“사라예보”는 1973년 여자 탁구선수 이 에리사와 정현숙이 구기종목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 제패를 한 곳이라서 익숙한 도시이름이다..

또 유명한 것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육군 훈련을 열병하던 중 저격당한 곳이다. 그것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동기가 된 것이기도 하다.


사라예보 시내는 1992년에 일어난 사라예보 내전으로 인한 상흔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살육전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시내 대부분의 건물에 총알과 파편 자국이 빈틈이 없다. 한마디로 성한 건물이 거의 없다. 1996년 평화를 유지하게 되기까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 병사들에게 보스니아의 이슬람 사람들이 참혹하게 살상을 당했다.

구소련연방이 해체되고 유고연방이 분해 되는 과정에서 1991년에 보스니아의 이슬람 사람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손잡고 보스니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인들은 이에 동참하지 않고 세르비아와의 분리 독립을 거부하였다.

당시 유고 대통령이었던 밀로세비치가 보스니아 정부의 무기를 세르비아계 군에 건네주었다. 보스니아 정부의 무기들을 모조리 차지한 세르비아계에서 다른 종족을 몰아내고 보스니아를 세르비아에 통합시키려고 무차별적인 살상을 감행하였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3년간 끝이 보이지 않은 살육전은 이슬람계통 사람들의 밀집지역인 사라예보를 온통 지옥으로 만들었다. 유엔군이 주둔하였지만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박물관 앞에는 당시 잔악한 살육전에 동원되었던 헬리콥터와 장갑차들이 파괴된 것을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큰 길의 한 광장에는 내전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24시간 등불을 켜 놓고 전쟁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있다.

시내 대부분 건물들의 무수한 총탄자국들과 길바닥을 수놓은 듯 파놓은 총탄 흔적들이 당시의 험악했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내전 때 파괴된 흉물스러운 건물들을 복구하지 못하고 방치해 놓은 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6.25전쟁 후의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이 겹쳐졌다. 파괴된 건물의 잿더미 속에 판잣집을 만들어 임시로 기거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전쟁은 인류의 적이다.’ ‘전쟁은 가장 야만적인 행위이다.’ 


다행인 것은 이제는 그 처참했던 戰禍를 뒤로하고 상흔을 치유하고 서로 보듬으면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안한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한다. 전쟁이 남기고 간 피해가 워낙 컸고 수많은 인명의 손실에다가 아직도 그 아픔을 몸으로 또 가슴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의 평온은 일시적인 봉합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훈이 되는 역사적인 사실로 넘어가려면 앞으로 많은 시간이 흘러가야 할 것이다. 보스니아가 항구적인 평화를 유지하고 보스니아 백성들이 전쟁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마음으로 빌어본다.


주인아주머니도 당시에 폭발물이 터진 곳에서 날아온 파편에 머리를 다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 몸이 피투성인 채 식구들이 지켜보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지낸다고 하였다. 그 때 뇌에 손상을 입어서 그런가, 주인아주머니가 이상한 행동을 보여 민망했다.


시내로 들어가다가 처음 들린 박물관은 주로 이슬람 인들의 생활 민속관이었고 고고박물관과 자연사관들이 있긴 하지만 좀 엉성하고 내용도 빈약하다.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원의 한쪽 마당에서는 땅에 금을 그어놓고 커다란 체스기구로 놀이를 하는 모습이 한가롭고 평온해 보였다. 

시내 안쪽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집시들이 득실거리니 주의하라고 하는데 무얼 주의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긴 사람이 집시인지 알 수가 없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니 가게에 진열해 놓은 상품, 사람들의 모습, 거리의 분위기 등이 터키의 어느 지방을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국립도서관이라는 건물이 내전 때 완전히 파괴되어 그대로 방치해 둔 모습이 안타까웠다. 흉물이 된 도서관 건물을 뒤로하고 밀랴치카 강변길을 따라 걸었다. 사라예보 시민들의 지난날의 모든 고통을 모두 이 강물에 흘려보내고 희망찬 내일을 일구어나갔으면 좋겠다.


오늘은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자기 혼자만의 영어로 신나게 열심히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몇 되지 않았다.


하여간 사라예보의 참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사라예보가 지향하고자하는 평화가 얼마나 간절한 것이었는지 현장을 안내한 주인아주머니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실감할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오늘 돌아다니면서 택시만 타고 다니는 바람에 지출이 좀 많았다.


이 집 식구는 주인아주머니와 남편(크로아티아 사람)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생인 딸이 하나 있다. 남편은 일거리가 없어서 시내를 돌아다니거나 방안에서 소일하는 것이 일과라고 구박을 많이 받는다

 

 

파이 서비스가 종료되어
더이상 콘텐츠를 노출 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