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65세의 젊은이가 중동과 동유럽을 헤매다<71> 소피아 2.

어르신네 2006. 11. 15. 22:58

소피아 2.

 

2005년 12월 23일 (금) 흐림

오늘도 눈이 휘날리는 날이었다.

손녀들에게 보낼 엽서를 부치려고 우체국에 갔다.

창구 앞이 한산해 보여서 얼른 담당직원에게 우편물과 돈을 밀어 넣었다. 직원이 한참 나를 쳐다보더니 Air Mail이라는 도장을 찍고 우표를 주면서 우편함에 넣으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런데 한 늙은이가 내 등을 두드리는 게 아닌가?  돌아보니까  무척 화난 표정이었다.

그는 손으로 뒤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우편물을 부치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인 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창구에서 약 2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창구 앞이 비어 있는 것만 보고 달려갔던 것이다. 참으로 미안하였다.

나는 무표정하게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I'm sorry!"라고 진심으로 사과하였다.

허리를 굽히면서 사과하는 나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표정으로는 알 길이 없었다.


우체국의 안내문은 전부 불가리아어로 써놓아서 어느 것이 국제우편물 함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편지를 가지고 함 앞에서 쩔쩔 매니까 어떤 사람이 내 우편물을 보더니 국제 우편물함인 듯한 곳에 넣어주었다.

동유럽에는 아직까지 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하여 영어로 안내해 놓는 간판이나 시설을 가추지 못한 것 같았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거리에 나가다니기가 거북했다. 오늘은 목이 아프로 감기 증상이  나타났다.

돈을 잃어버려서 엉망이 된 마음과 감기 증상들이 내 건강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저녁에 맥주를 마시려 나가자는 영국인의 권유를 사양해야 했다.


저녁 때 옆 침대에 있던 미국 청년 로버트가 이스탄불로 떠났다.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맥주도 같이 나눠 마시던 젊은이인데, 그리고 카메라 사용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인데 떠난다고 하니까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저녁 늦게 일군의 미국 젊은이들이 들어왔다. 무척 시끄러운 친구들이다.

그들의 문화가 그렇거니 그렇게 취급하면 그만일 터인데, 왜 그리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다른 투숙객들도 그들의 행동거지에 모두 정신이 빼앗긴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순진한 모습, 발랄한 모습만 보고 생각하자.

또 그들의 젊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2005년 12월 24일(토) 흐림

오늘 아침에 한국인 남녀 2명이 왔다. 반가웠다.

그런데 그들이 터키에서 불가리아로 들어올 때 까다로운 입국심사로 인하여 힘들게 입국하였던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또 한명의 한국 학생이 왔다.

한국인 네 명이 한 호스텔에 머물게 되었다. 반벙어리가 되어 외톨 신세를 면치 못했는데 이제 한국인들을 만났으니 내 타들어가는 울화통을 하소연할 수 있는 곳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우리 동포를 만나서 내가 당했던 일을 얘기한다는 것이 너무나 못난 짓거리 같아서 차마 얘기를 꺼내기가 부끄러웠다. 그냥 가슴에 묻어둘 수밖에........

 

한국인들과 Aleksander Nerski Church를 돌아보고 대통령 궁으로 갔다가 의회건물 앞을 지나 소피아 대학 국립도서관을 스쳐 소비에트 군인 동상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다녔다.

다시 시장으로 들어가서 이 소피아의 토속적인 모습을 구경하려고 돌아다녔다.

노점상들이 추위를 무릅쓰고 좌판을 지키고 있는 모습에서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였다. 

날씨가 추워서 오래도록 밖을 돌아다니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돌아다니다가 너무 추우면 정교회로 들어가서 몸을 녹이곤 하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불가리아 정교에서는 많은 신도들이 촛불을 들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성직자로부터 축성도 받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저녁에는 서양인들은 모두 카페로 나가고 우리 한국인 넷이서 오붓하게 저녁을 먹고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매니저에게 소피아 시내에서 크리스마스 전야제 같은 것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불가리아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야에 모든 사람들이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하였다.

시내 일부 유흥업소나 외국들을 상대로 하는 몇 안 되는 업소를 제외하고는 모든 상점의 주인이나 점원들은 일찍 문을 닫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저녁에 시내에 가면 아주 조용하고 정적이 감돌아 볼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서양 사람들이 카페로 몰려 나간 다음 사가지고 들어온 맥주로 크리스마스이브의 기분을 냈다.


 

2005년 12월 25일 (일) 흐림

날씨가 풀렸는지 거리의 눈이 많이 녹았다.

어저께 기차표를 예매해 놓았는데 한국인 두 명이 같이 가기로 하였다. 

한국인 대학생 한 명은 독일로 갔다가 귀국한다고 하였다. 나와 같이 동행하기로 한 한국인 남녀 두 명은 소피아만 돌아보고 터키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오늘은 아침 10시경에 Aleksander Nevski Church로 가서 불가리아 정교회 성교 의식을 구경하였다.

미사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들어와서 촛대에 꽂아놓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제대(祭臺)에서 성직자들이 하는 말도 못 알아듣겠고 성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아무리 지켜보아도 의식 절차도 알 수가 없었다. 

교회 안은 향내가 진동을 하고 촛불이 타면서 내쏟는 그름 냄새가 감기 증세가 있는 나에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우리나라 같으면 크리스마스 미사는 대개 11시경에 집전하는데, 성직자들은 10시 이전부터 나와서 의식을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제대에서 계속하여 기도문을 외우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신자들도 가끔 화답을 하고 하는데.......

1시간 정도 교회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더니 목이 아프고 기침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11시 20분경에 교회 밖으로 나왔다. 눈은 녹고 있으나 바람 끝이 매웠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적당한 음식점에 들어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걸어가는데 호스텔에 남아 있다가 나중에 나온 한국인 두 분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터키음식점에 들어가서 점심식사를 해결하였다.

 

나는 감기 증세 때문에 호스텔에 들어와서 안정을 취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돌아온 한국인들과 함께 5시40분경에 이스탄불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호스텔을 나왔다.

호스텔 매니저인 아선 다비더프(Asen Davidov)가 나오면서 건강을 잘 챙기고 여행하면서 항상 조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호스텔에 도착한 이튿날 내가 부쿠레슈티에서 많은 돈을 잃은 것을 말하였더니, 나를 위로하면서, 자기호스텔에 있는 정보노트에 그 사실을 적어놓으면 한국 사람들이 와서 참고할 수가 있을 것이라 하여 자세히 적어놓았다. 

 

아선 다비더프는 공산주의 시절에 소피아대학교에서 한국말을 배웠는데 제법 통화가 되었다.

호스텔에 한국 사람이 많이 와야 자기의 한국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영한사전은 있는데 한영사전이 필요하다고 하여 내가 귀국이 늦더라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영사전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스탄불로 출발하는 기차가 1시간이나 연착하여 9시 05분에 소피아를 출발하였다.

11시경 국경역 에서 출국수속을 마치는 데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더니 터키를 입국할 때에는 터키국경 역에 정차하여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의자에서 한잠 자고 일어났다. 26일 아침 7시 30분이 되어서야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