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의 젊은이가 중동과 동유럽을 헤매다<77>하마 그락 데 슈발리에
2006년 1월 3일(화) 맑음
8시 30분에 하마로 가는 버스 정거장에 갔다. 버스정거장 입구에서 경찰이 짐 검사를 하였다. 통제사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일찍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느라고 차가운 바람에 한참 시달렸다. 주위 사람들의 눈길이 모두 동양인인 내게로 쏠렸다.
9시 30분에 하마로 가는 미니버스가 출발하였다. 버스가 출발할 때는 십여 명이 탔었는데 시내를 조금 벗어나서 거의 다 내렸고, 달랑 세 사람만을 태우고 하마까지 왔다.
미니버스는 지중해안을 끼고 Tartus로 가는 고속로를 따라 20여분 달렸다가 방향을 동쪽으로 바꿔 높은 산악지대로 올라갔다. 이 산의 이름은 Jebel Ansariyya로 지중해 연안과 시리아 내륙 사이에 높이 솟은 산이다. 버스가 낡아서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가 닫혔다가 하고 창문으로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버스 안을 마구 휘저었다. 산중허리에까지 인가가 빼곡하게 들어있고, 높은 산중에도 인가는 드문드문 보였다. 산에는 크지 않은 나무들이 바위들과 어울려 듬성듬성 있었다. 산이 높을수록 사막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bel Ansariyya
산악지대를 오르던 차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굽이굽이 틀어 올라갔다. 고갯마루에 정차하여 20여분 쉬었다. 고지에는 눈이 쌓였고 웅덩이의 물이 꽁꽁 얼었다.
해안 지역에서는 감귤을 많이 생산하는 것 같았다. 지중해 해안지역에서 내륙으로 넘어가는 Jebel Ansariyya 고갯길에는 노란 귤을 가득가득 실은 화물차량들이 많이 보였다.
고갯마루에서 내륙 쪽으로 급경사 길을 20여분 내려갔다.
시리아의 평지는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마로 가는 시원하게 뚫린 길에서의 이국의 풍치는 이방인인 나에게는 신비롭기만 했다. 넓고 푸른 벌판,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나무들, 길을 걸어가는 시리아 사람들 모습이 모두가 내 눈에는 신기하게 비췄다.
12시경에 하마에 도착하였다.
Riad Hotel에 숙소를 정하고 주변 지리를 익히려고 여관을 나섰다. 여관 바로 앞에 하마에서 가장 붐비는 광장과 시계탑이 있다. 길 건너 공원에 있는 물레방아가 보였다. 이 물레방아는 식수와 관계(灌漑)용수를 공급하는 수로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14세기에 세워졌던 것이라 한다. 지금은 그런 용도가 아니라 관광용 시설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원에는 중동의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고원을 나와 언덕길을 넘어 바자르로 갔다. 바자르(Bazar: Market)가 제법 붐볐다.
하마 중심지의 시계탑
하마의 물수레
산책나온 엄와 아기들
하마의 한 바자르(시장)
하마(Hama)는 선사시대의 주요 거주지역이였으며, BC 11세기에 아랍인들이 다스리는 하마스 왕국이 세워졌다. BC 9세기에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그 뒤로 페르시아·마케도니아·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BC 2세기에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도시의 이름을 에피파네이아로 바꾸었으나 비잔틴 제국이 다스리는 동안에 다시 옛 이름인 에마스로 바뀌었다. 7세기에 아랍인들이 차지했을 때 주요 그리스도 교회는 이슬람교 대사원으로 개조되었다. 1108년에 십자군에 점령되었으나 1115년에 이슬람교도가 다시 차지했다. 1175년에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1188년에 살라딘, 1300년경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술탄, 16세기초에는 오스만인들에 의해 각각 점령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지금의 시리아로 넘어갔다
1980년대초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정치 불안은 1982년 2월에 일어난 반란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반란은 엄청난 군사력이 동원되어 진압되기는 했으나 옛 시가지의 1/4 정도가 파괴되고, 약 2만 5,000명의 사람이 죽는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
하마는 하나의 도로와 철도를 통해 하마 시와 북쪽 및 남쪽이 연결되며, 다른 도로 하나는 지중해 해안과 이어진다. --<출처 : Daum 백과사전홈>--
여관에는 손님이 사용할 수 있는 주방이 있어서 음식을 해먹을 수가 있었다. 주방도 깨끗하고 매니저와 직원들도 상냥하여 좋다. 그래서 야채시장에 들러 과일과 채소 등을 샀다.
마침 여관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저녁식사도 같이 해서 먹었다.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시는 K 선생님이었는데 방학에 틈을 내어 혼자 여행을 하시는 분이었다. 선생님이 방학을 이용하여 여행을 하면서 견문을 넓히면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육 자료를 만들어 제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현직에 있을 때 왜 그러지 못했을까.... 지금 와서 후회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7일부터 14일까지 이슬람 사람들의 명절 기간이라서 미리 빵과 야채를 준비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시리아는 터키나 요르단에 비해서 물가가 싸서 여행비용이 적게 든다고 하던데 나는 오히려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해놓고 나면 요령부득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다. 집에서 새는 그릇 나가면 다르겠는가. 그래도 돈을 적게 쓰는 요령을 부려 봐야겠다.
2006년 1월 4일(수) 구름
8시에 Homs로 가는 버스를 탔다.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바람에 날리는 먼지로 인하여 공기가 탁해서 숨쉬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고물차들이 언덕배기로 올라가면서 토해내는 가스가 심각하다. 나는 Homs에서 크락 데 쉐발리에(Crac des Cheval!iers)로 가는 미니버스를 탔는데 이놈의 버스가 갈 것인지 말 것인지 30분이 지났는데도 꼼짝하지 않는다. 손님을 꽉 채워서 갈 모양이다. 1시간 이상을 기다린 후 버스에 손님이 꽉 찼다. 그제야 미니버스가 출발하였다. 11시가 지나서 Crac Des Cheval!iers에 도착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괄랏 알 호슨(Qala'at al-Hosn)’으로 부른다고 한다.
Crac Des Cheval!iers(십자군시대 기사의 성채)
서기 1099년 유럽 기독교 국가들로 구성된 십자군은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했다. 기독교 성지를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탈환하자는 구호 밑에 시작된 십자군전쟁의 승리였다. 이로써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시대가 열렸다.
1096년 유럽을 출발한 십자군의 대장정은 오늘날 터키의 최남단 도시 안디옥(현재의 안타키아)을 점령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남진을 계속해 마침내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십자군은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십자군은 남북으로 700km나 되는 이 지역에 50개가 넘는 요새 성채를 축성하였다. 이 성채들은 십자군 건축 양식에 따라 하나같이 규모가 웅대했지만 13세기말 십자군의 패배와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7백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오직 웅장한 골격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곳의 예외가 있다. 십자군 시대 성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곳이다. 그곳은 시리아의 크락 데스 셰발리엘(Crac des Cheval!iers)라고 부르는 성채다. 기사의 성채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당시 성채의 구조와 축성법 연구에 교과서가 되고 있다. 또 유럽전체를 포함해서 중세 건축물 가운데 건축법이나 건축미가 매우 뛰어난 것 중 하나로 꼽혀 건축사 연구에도 빼어놓을수 없는 곳이다.
숫자로 볼 때 십자군은 전혀 대군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을 때 십자군 수는 1만5천명을 넘지 않았다. 그 후 예루살렘에 주둔했던 십자군 기사들은 고작 300명 남짓했다. 소수의 십자군이 다수의 적대적인 지역을 관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십자군은 수적 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군사적 요지에 수많은 성채들을 건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지역을 장악했다. 십자군 성채는 군사들이 주둔하는 요새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했다. 크락 데스 셰발리엘은 모슬렘의 중요한 도시 홈스(Homs)와 지중해를 잇는 중간지점의 전략적 위치에 세워졌다. 이 성채가 완성되었을 때 모슬렘 사가는 모슬렘 세계의 목에 박힌 가시라고 표현했다.
이슬람교도들인 모슬렘들은 이 성채를 빼앗기 위해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무적의 살라딘도 이 성채를 공략하러 갔다가 성공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다음날 철군했다는 일화도 있다. 크락 데스 셰발리엘은 해발 750m 칼릴(Khalil)산 정상에 오각형 형태로 우뚝 서 있다. 길이는 남북이 200m, 동서가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평에 이르는 큰 규모다.
이 성채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이 완벽한 이중구조라는 것이다. 우선 든든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다. 내성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부분을 45도 각도의 경사면으로 만들어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성 밑부분을 경사지게 만든 축성법은 성벽자체를 지진에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성채 안으로 들어서면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중세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바닥이 꺼지면서 적을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장치, 몇 년을 공급할 수 있는 식량을 비축했던 곡식저장소, 거대한 물 저장소, 방의 길이가120m에 달하는 대 집회소, 예배소, 식당, 숙소, 미로와 같은 비밀 통로들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어 갑자기 어느 구석에서 육중한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사가 나타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1271년 이집트의 술탄 베이발스(Sultan Baybars)는 군대를 이끌고 이 난공불락의 요새 크락 데스 셰발리엘을 공격했다. 격전 끝에 외성을 뚫는 데는 성공했으나 내성은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이를 함락시키는 것이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베이발스는 한가지 계략을 꾸몄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성안의 십자군들에게 한 통의 비밀 서신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십자군 총사령관이 보낸 밀서였다. 그 밀서에는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투항하여 유럽으로 철군하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저항하던 십자군들은 할 수 없이 베이발스에게 지중해를 통해 유럽으로 돌아가는 귀로의 안전을 보장한다면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베이발스가 이 조건을 수락하자 십자군 성채에는 곧 백기가 휘날리게 되었다. 십자군이 전달받았던 밀서는 베이발스가 꾸며낸 가짜였다. 그러나 십자군의 투항으로 이 성채는 파괴되는 운명을 면할 수가 있었다. 1271년 이 성채의 함락을 시작해서 십자군 성채들은 차례로 모슬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20년 후인 1291년,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아코(Acco)가 함락됨으로써 십자군 운동은 실패로서 그 역사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출처 : 박준서 교수의 '성서세계 탐방'중에서
성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갔다. 우측에 또 높은 성벽이 보였는데 그것은 내성이었다. 외성은 좀 얕게 쌓아올렸고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해자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들어섰던 곳은 해자(垓字) 지역이었다.
외성에서 적을 관찰하고 방어하던 참호 같은 것이 있고 성곽 중간 중간에 망루도 설치하였다. 내성은 외성보다 더 높이 쌓아올려서 전망대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참호를 성을 돌아가면서 설치해 놓았다. 성벽은 천년 세월을 견뎌 낸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견고하고 웅장하다.
성 내부는 교회를 비롯하여 성안에서의 생활에 필요한 공간을 만들고, 각 공간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인원을 할당하고 거기에 합당한 임무를 맡수행했을 것이다. 성에 있는 공간을 기능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크락데슈발리에 성채는 공중에 높이 솟아있는 듯하다. 그리고 800년 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내려온 성으로서는 잘 보전되었다.
나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굴과 같은 곶에는 손전등을 밝히고, 음습한 냄새를 마셔가면서 성 내부를 샅샅이 돌아다녔었다. 그대로 나가기가 아쉬워 또 한바퀴를 돌아다녔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바라보이는 경치도 매우 좋았다.
오후 1시가 되니까 성안을 구경하던 그 많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쑥 빠져나가버렸다. 나와 같은 배낭여행자들만 얼쩡대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더 돌아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한가해진 통로를 따라 성밖으로 나왔다. 때마침 하마로 가는 미니버스가 도착하여 바로 차를 탈 수 있었다.
하마에 오니 4시30분정도 되었다. K선생이 사온 통닭과 부속재료로 닭백숙을 만들어 저녁식사를 배불리 먹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여행에 관하여 많은 정보를 교환하였다.
여관에 여행자들이 적어놓은 정보노트가 있었다. 그 중에 레바논 베이루트의 루트에 대하여 상세히 소개한 글이 있었다. 베이루트를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저녁에 베이루트에 관한 생각 때문에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다.
다음 사진들은 Crac Des Cheval!iers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