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의 젊은이가 중동과 동유럽을 헤매다<78> 팔미라
팔미라
2006년 1월 5일(목) 구름
오늘 베이루트 가는 것은 포기하고 애초 계획대로 팔미라(Palmyra)에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K선생은 다마스커스 행 버스 정류장으로 가고 나는 Homs로 가는 미니버스를 탔다. 나와 K선생은 다음 여행지가 겹치는 곳이 있어서 어디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오늘은 운전기사들에게 바보같이 당하기만 한 날이었다. 여관에서 미니버스 정류장까지 택시비를 25파운드만 주어도 되는 것을 35파운드를 지불하였다. 하마에서 홈스로 가는 미니버스비도 배낭 운임비를 따로 받았다. 홈스의 미니버스 정거장에서 팔미라가는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택시비도 바가지를 흠뻑 썼다. 게다가 팔미라에서 내려 여관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했다가 또 바가지를 썼다.
오늘은 음산한 날씨 때문인지 마음도 밝지 않다.
팔미라로 가는 버스에 올라앉자마자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좌우전후가 분간되지 않는 사막 속이었다. 버스가 달리기는 하는데 사막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가도가도 끝없는 사막, 그런데 사막 한 가운데 움막이 보였고, 그 부근에는 풀다운 풀도 없어 보였는데 양과 염소 떼가 있었다. 뽀얀 먼지가 이는 사막 속에서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보이지 않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양이나 염소를 키우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버스를 세우고 내리는 멀쩡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이런 척박한 사막 속에 삶의 둥지를 틀었을까, 원래는 사람이 살만한 땅이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막화되어 갔고 사막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거기에 적응하는 삶의 방법과 지혜를 터득한 것일까? 삶의 터전이 황폐해지면 살던 곳을 등지고 더 좋은 환경을 찾아갔을 텐데.......
어떤 연유로 이런 척박한 땅으로 내몰린 것일까? 살기 좋은 땅에 힘 있는 자들이 들어와서 백성들을 노예로 만들어 갖은 박해와 횡포를 가하자 이를 피해 권력자들의 관심 밖의 지역인 이런 사막으로 찾아들어 삶의 둥지를 틀었을까? 아니면 다른 종족들의 침입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겨서 피하고 피해서 찾아든 곳이 이런 곳이었을까.......
중동지역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권력자들의 욕심에 내몰린 백성들이 자기 개인의 생활을 빼앗긴 채 노예로 전락하여 오로지 그 큰 유적지를 만드는 役事에 일생을 묻어버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 노예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자유로운 방랑자로 사막을 떠도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다.
한편 사람들이 이런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박고 사는 것을 보니 인간의 억척스러움과 끈질긴 생명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두어 시간 달려온 버스가 정차한 곳은 군주둔지 부근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나무들이 보이고 건물들도 보였다. 군인들이 많이 주둔한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았던 젊은이가 버스에서 내려가더니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와서 나에게 하나를 주는 것이었다. 혹시 커피에 정신을 잃는 약을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서 사양하였더니 아주 난색을 표하는데 그 표정이 너무나 순진해 보였다. 그래서 받아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조금 맛을 보았다. 설탕이 적어서 조금 썼다. 그러나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에 넣은 약의 효력이 언제쯤 일어날까.’ 혹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약효를 내 의지로 이겨내야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사실 그 젊은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팔미라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생각에 마음이 붙들렸었다. 왜냐하면 부르샤에서 한국인 여행자가 현지인이 주는 음료수를 마시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까 가지고 있던 소지품이 모두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내가 이스탄불에서 시리아로 넘어오기 직전에 들었었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팔미라에 도착했을 때 택시 기사들이 다가와서 여관까지 가는데 100sp를 요구하였다. 그래서 집요하게 달라붙는 그들을 물리치고 조금 멀더라도 그냥 걸어서 찾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버스 한 대가 학생들을 가득 싣고 내 앞에 와서 서더니 ‘이 차는 여관부근까지 가는데 타라’는 것이었다. ‘참 친절한 버스기사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탔다. 어린이들이 가득 탔는데 모두 나만 쳐다보면서 신기해하는 표정들이었다. 여관 앞이라 하기에 내리려고 하니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택시는 100ps를 받는데 이차는 버스니까 50ps만 내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50ps를 주고 내렸다.
오늘은 온통 한 대씩 맞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여관을 찾아갔다.
몸이 많이 피로해진 모양이다. 기분도 별로 좋지 않고 감기 증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방에 전기 히타를 켜 놓기는 했는데 외풍이 있어서 잠자리가 춥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된장을 끓여 마셨다. 뱃속이 시원하였다.
2006년 1월 6일(금) 맑음
간밤에 방이 추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히터가 역할을 해준 것 같다. 그러나 몸이 무겁고 머리도 맑지 못하다. 팔미라의 유적지를 보는 날이다.
팔미라는 서아시아의 시리아 사막 한 중간에 위치한 도시이다.
동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서로는 지중해 남으로는 아라비아반도 북으로는 아나톨리아를 연결하는 교통요지였다. 주변에 분당 3㎥의 물을 뿜는 에프카 샘물을 비롯한 몇 개의 수원도 있어 시리아 사막 지역에서 유일하게 물이 넉넉하여 일찍부터 사람들이 정주하고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했으며 대상 교역이 활발했다.
팔미라의 이름은 셈어 사용이전의 이름인 타드무르의 그리스어 라틴어 형태라고 한다. 팔미라는 기원전 페르시아 치하에 있다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의 동정(東征)을 계기로 그리스 로마의 영향권에 들게 된다.
Palmyra는 한 때 그리스의 중요한 전초기지였다. 천년 동안 Assyrian caravan Town이었으나 2세기동안 그리스 시대에 영화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217년에는 로마에 병합되어 유래 없는 부(富)를 누렸었다.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Zenovia인데, 그녀는 Greek인과 Arab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제2의 클레오파트라라고 일컬어진 여왕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야심 찬 인물이었다.
그의 남편 Odenathus의 의문스런 죽음 이후 AD267부터 팔미라의 군주가 되었었다. 그녀의 군대는 로마와 맞서 싸웠으나 AD271년 Aurelianus의 세력에 의해 완전히 패배했으며 2년 뒤에는 이 도시는 Aurelianus의 손아귀에 들었다. 이것이 팔미라의 끝의 시작이었다. 634년부터는 Muslim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1089년 지진(Earthquake)으로 인하여 마침내 팔미라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8시경 식당으로 내려가서 아침밥을 먹었다. 서양의 젊은이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였다. 장사꾼들이 옆에 와서 물건을 사라고 귀찮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택시를 타야 제대로 구경을 할 있다면서 택시를 이용하라고 졸라댔다. 옆의 서양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애기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서양여자 한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알페포 Spring Flower Hotel에서 보았던 여자였다.
장사꾼들이 택시를 타고 유적지를 돌아보라는 것을 내가 거절하고 ‘워킹(Walking)을 하겠다.’고 하였더니 아침을 같이 먹던 서양인들이 자기들도 걸어 다닐 것이라면서 나에게 동행하자고 하였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걸어서 유적지로 향하였다. 일행은 미국의 필라델피아 아가씨 Leah Frazer, 캐나다 여인 Jennofer Dueck, 뉴질랜드 청년 Oeter Anderson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었다.
팔미라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니 유적지 관리가 영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타몰이꾼들과 장사꾼들이 유적지를 헤집고 다니면서 더욱 황폐화시키는 것 같았다. 낙타몰이꾼들은 우리들에게 끈질기게 탁타타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벨(Bel) 신전에 들어갔다(입장료 150sp). 벨 신전은 동서 길이 210m의 정방형이며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중심부에 코린트 양식의 열주(列柱)로 둘러싸인 본전이 있다. 본전을 둘레에 있던 열주는 들어가는 입구에서 보면 본전 뒤쪽에만 남아있다. 그리고 지금은 남쪽에만 원주(圓柱)들이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는데, 원형인지 복원해 놓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보기 좋게 줄지어 있다.
본전 입구에는 본전에서 떨어져 나온 석조물들 중에 중요한 것들을 모아놓았는데 지진으로 파손되고 풍화작용으로 마모되어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직사각형 석조건물인 본전에서 주신 벨(Bel)을 중심으로 태양신과 월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벨 신전의 뜰을 가득 매운 돌덩이(토막난 원주와 각종 기둥, 석조, 주춧돌 등)들이 어느 것 하나 예사롭게 보이는 것이 없다. 벨 신전 여기저기에서는 지금도 발굴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벨 신전을 나와서 길 건너에 유적지로 향하였다. 유적지 입구에 커다란 아치형 문이 관광객들을 맞아주었다. 아치형의 문 너머 서쪽으로 펼쳐진 황량한 벌판에 거대한 원주들이 숲을 이뤘다.
아치형 문을 지나 원주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다 보면 남(왼)쪽에 극장(The City Theatre)이 있다. 거의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복원을 하면서 많이 손질이 된 것 같았다. 이 극장은 1950년까지 모래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 복원한 것이라 한다. 우리는 원형 극장에 앉아서 팔미라가 번창했을 때의 모습을 떠 올려보았다. 오늘날의 극장과 같은 기능을 하였을까? 토의 장소의 기능? ........ 그런데 장사꾼들이 와서 물건을 팔아달라는 등쌀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극장을 나와 다시 원주의 숲길을 걸었다. 구조가 좀 크고 특이한 네 개의 기둥(Tetrapyon)이 보였다. 초입의 아치에서 곧게 이어지던 길이 이 네 개의 기둥을 기점으로 약간 휘어진 것 같았다.
Tetrapyon의 남서쪽에는 시장(agora)이 있었고, 북동쪽에는 신전(Temple of Baal Shamin)이 있었다고 한다. Tetrapyon의 서북쪽으로 복원해놓은 열주(列柱)를 따라 올라가면 장례식의 사원(Funerary Temple)과 Camp of Diocletian의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치가 있는 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가량 올라간 열주로(列柱路)는 다시 남서쪽으로 100m 이상 꺾어져 나갔다.
우리는 거기서 Funerary Tower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타워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층마다 시신 안치실이 여러 개 보였다. 서쪽 골짜기에는 이런 장례(葬禮) 타워가 군데군데 보였다. 무덤은 타워와 동굴에도 만들었던 것 같았다. 산의 굴속에 들어갔더니 굴의 벽면에 시신을 안치했던 석관들이 보였다.
우리는 열주를 따라 올라갔다가 장례타워를 돌아보고 내려오면서 열주가 서있는 남서쪽과 그 반대편인 동북쪽의 허허벌판을 종횡으로 다녀보았다. 그 허허벌판은 고대 팔미라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도구나 건축물의 잔해들로 꽉 차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장대한 열주들과 무수히 흩어져 있는 잔해들이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당시에는 웅장한 건물과 다른 구조물들과 꽉 차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뉴질랜드 청년 피터는 인터넷방으로 가고, 나는 카나다 여인 제니퍼와 필라델피아 처녀 리아와 함께 일몰을 구경하려고 다시 팔미라 유적지로 갔다. 리아 양은 유적지의 공한지에서 공차기에 골몰한 아이들을 보더니 그 틈에 끼어들어 공만 따라다니고 있었다. 나는 산꼭대기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해가 구름에 가려서 일몰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산으로 올라가려던 생각을 접고 유적지를 이리저리 다니면서 부서진 유적지의 파편들을 살펴보았다. 땅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돌들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소중한 문화유산이었다. 하나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가치를 지닌 것들이 이리저리 굴어 다녔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 유적지에서 돌아오다가 저녁을 사먹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내일 7시 30분에 리셉션에서 만나서 다마스커스로 같이 가기로 하였다.
오늘은 방이 좀 따뜻하게 느껴져서 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