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의 젊은이가 중동과 동유럽을 헤매다<80> 암만(Amman)
암만(Amman)
2006년 1월 9일(월)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제 저녁에 꾸려놓은 짐을 들고 살며시 방을 나오는 데, 피터와 일본 청년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리아가 따라 나오면서 문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택시를 타고 암만행 택시 정거장으로 갔다
암만(Amman)행 바람케 세르비스 및 택시 정류장(Baramkeh Service & Tax Station)에 도착하자마자 택시기사들이 나에게로 달려왔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고 하기에 암만이라고 했더니 두 사람이 달려들어 내 가방을 낚아채는 것이었다. 가방이 파손될까 걱정되어 내가 가방을 달라고 해도 들은 채 만 채하면서 가방을 가지고 밀고 당기면서 다투는 것이었다. 내가 호루라기를 꺼내어 획획 불었다. 그리고 가방을 잡았더니 둘 다 슬며시 가방을 놓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붙어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어떤 놈이 살며시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가 잡은 가방을 빼앗아서 나를 끌고 가면서 암만행 택시를 타라는 것이었다. 택시 밖에서는 사람들이 싸우는 두 사람을 뜯어 말려서 겨우 떨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분이 덜 풀렸는지 삿대질을 하면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택시는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5명 꽉 차야 떠난다고 하였다. 30여분 기다려서야 5명이 찼다. 택시 운전수를 보니 아까 싸우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가방을 택시에 실어준 놈이 다가 오더니 팁을 요구하였다. ‘누가 가방을 들어달랬나?’ 어이가 없어서 빤히 쳐다보기만 하였더니 이놈이 성질을 내는 것이었다. 못주겠다고 버텼더니 어디서 차이 한 잔을 가지고 와서 1불만 달라고 했다. 내가 완강하게 버티니까 자기들은 박시시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나중에는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로 싸우더라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할 수없이 10sp를 주었다.
택시가 8시 조금 못되어서 출발하였다. 다마스커스 시내를 벗어난 택시는 사막 한 가운데로 달려갔다. 한 시간 이상 달려서 국경 가까이 왔을 때 안개가 앞을 가렸다. 안개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넘어가는 국경 초소에 닿았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요르단 지역으로 넘어왔다. 요르단 출입국 사무실에 가서 10jd을 주고 비자를 받고 입국 신고를 한 다음에 짐 검사를 받았다. 요르단 입국 절차는 아주 간단하였다. 그러나 내 앞 사람들의 짐을 검사하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었다. 내 차례에서는 간단히 검사가 끝났다.
요르단으로 넘어와서도 한동안 안개로 인하여 주위경관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국경에서 암만까지 오는 길은 사뭇 평지만은 아닌 것 같았다. 차가 높은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다가 가파른 경사로를 조심스럽게 내려가기를 여러 번 하였다.
10시 40분경에 암만의 택시 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다시 암만 시내 택시 기사에게 지도에 표시된 여관까지 가자고 하였더니 2jd를 요구하였다. 가까운 거리였는데, 내가 속은 것 같았다.
Cliff 여관의 2인실에 들었더니 하마(Hama)에서 만났던 싱가폴 청년 Raymond Ang이 묵고 있었다. 반가웠다. 그는 막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어딜 가느냐?’고 물었더니 ‘Dead Sea'라고 하여 나도 따라가고 싶다고 했더니 좋다고 하였다. 생각도 못했던 Dead Sea를 가게 된 것이었다.
여관을 나설 때는 멀쩡하던 하늘이 Abdali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는 검은 구름이 하늘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우리 앞으로 어떤 녀석이 다가오기에 사해(死海)로 가는 버스를 물었더니 사해에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여기서 사해에 가려면 택시를 대절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녀석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여관 지배인의 말로는 Abdali 버스 정거장에서 Shuneh로 가는 미니버스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떤 상점에 가서 다시 물어보았다. 상점 주인도 택시를 타고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라고 했던 녀석이 우리 뒤를 따라와서 가게 주인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간에 암묵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때 한 신사가 우리에게 한 미니버스를 가리키면서 사해에 가려면 그 미니버스를 타라는 것이었다. 아마 이 신사는 우리가 택시기사에게 끌려 다니는 것을 보다 못해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 신사는 우리가 버스에 오르자 사해에 가는 방법을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그는 이 미니버스는 40분 쯤 가면 종점인데, 바로 그 종점에서 Shuneh로 가는 미니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는 것과 갈아 탄 미니버스가 종점인 Shuneh에 도착하면, 사해로 가는 버스가 있기는 하지만 택시를 타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우리에게 택시를 타라고 권하던 녀석이 성질을 내면서 그 신사와 큰 소리로 언쟁을 하였다. ‘다 된 죽에 왜 코를 빠뜨리느냐?’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미니버스를 타고 앉아있는데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버스가 출발하면서부터 억수처럼 비가 내렸다. 걱정이 되었다. 싱가포르 청년 레이몽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고도 꾀나 먼 거리를 달렸다. 암만에서 Shuneh까지 1시간 30분 이상을 사뭇 내리막길로 달려왔다. 대부분 급한 내리막길이었다. 암만은 상당한 고원지대에 위치한 것 같다. 암만은 쌀쌀했는데 Shuneh에 도착하니 날씨가 후덥지근하였다. 다행히 버스가 내리막길이 끝나고 종착지에 가까워지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갰다.
우리는 사해로 가는 버스가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사해로 가는 버스 너무 늦은 시간에 있었다. 그래서 택시를 탔다. 왕복 10jd를 달라는 것을 7jd에 흥정하여 사해까지 갔다. 파리때가 얼마나 많은지 택시속이 온통 파리 소굴 같았다.
사해에 도착하여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곳으로 가서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물이 따뜻하였고 몸이 물에 둥둥 뜨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신기해서 물속을 이리저리 해엄을 치면서 즐겼다. 바다에는 아무도 없고 우리 둘만의 공간이었다. 물에 소금기가 얼마나 많은지 수면 가장자리에 소금 덩어리가 바위처럼 굳어서 큰 덩어리진 것들이 많았다. 수면 가장자리는 흙이 아니고 하얀 소금으로 포장을 해 놓은 것 같다.
물이 맑고 따뜻하여 얼마든지 수영을 할 수 있었다.
사해의 맞은편에 보이는 땅은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바로 건너다 보이는 곳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들으니 거기에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번 여행에서는 빼기로 하였다.
버스기사와 약속한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으로 물에서 나왔다. 택시기사에게 되돌아가는 길에 이스라엘과의 국경지역에 있는 Bathany Site라는 곳을 잠깐 들려서 갈 수 있느냐니까 흔쾌히 대답하였다.
우리는 Bathany Site로 가다가 이스라엘 국경으로 가는 길목 검문소에서 시간이 늦어 입장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검문소에서 되돌아 Shuneh로 왔다. 기사 녀석이 많은 거리를 돌아왔으니 3jd를 더 달라고 하여 10jd를 주었다. 마침 바로 암만행 버스가 있었다. 여관에 돌아오니 한국인 자매와 포천에서 왔다는 두 가족을 만났다. 역시 이국에서 동포는 반갑다.
내일은 이슬람 인들의 명절이라 아침 식사가 어려울 것 같아서 빵을 미리 사두었다.
2006년 1월 10일(화) 구름
이른 아침 레이몽이 오늘이 이슬람 인들의 명절이라서 앞에 있는 모스크에 가면 볼거리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여 같이 나가 보았다. 모스크에는 아침 예배를 하려오는 사람들의 바쁜 걸음걸이만 보일 뿐 다른 행사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레이몽이 헛다리를 짚은 것 같다.
몸도 피곤하고 머리도 무거운데다가 어저께 빨아놓은 옷이 마르지 않아서 오전에는 여관에서 쉬면서 옷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바깥에 떠드는 소리가 나기에 나가 보았더니 여관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길바닥에서 양을 잡고 있었다. 여러 마리가 도살을 당하였다. 아마 오늘은 명절이라서 양고기로 음식을 해서 나누어 먹는 날인 모양이다.
오후에는 시내에 있는 Citadel을 찾아갔다.
Jebel Al-Qala'a에 있는 성채는 Umhhad Palace를 발굴한 유적이다. 남아 있는 건물로는 커다란 돔을 덮어 쓴 건물이 가장 눈에 들어왔는데, 돔은 近者에 복원해 놓은 듯하다. 물 저장 탱크(Umayyad Cistern) 그리고 Byxantme 공회당 Temple of Hercules의 기둥들이 보존되어 있다. 아직 발굴이 덜 된 것인지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넓은 공터에는 복원을 기다리는 원주들과 채굴해놓은 각종 석재들을 여기저기 모아 놓았다.
성채가 구릉지대에 있어서 찾아가기가 쉬웠다. 여관에서 30분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성채 안에 박물관도 있는데 오늘이 이슬람 명절이라서 문을 닫았다. 성채에서 암만 시내를 대강 살펴 볼 수 있었다. 암만 시내는 여러 곳의 구릉지대와 저지대로 이루어졌다. 북쪽 언덕에는 대형 요르단 국기가 게양된 것으로 보아 거기에 정부의 중요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성채를 대강 돌아보고 여관으로 돌아와서 오후에는 쉬었다.
싱가포르 청년 레이몽이 나에게 한국에 대해서 질문공세를 해댔다.
한국의 현재정부의 성격과 과거 역사에 대한 것을 많이 물었다.
그리고 한글에 대하여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한글의 자모순과 발음을 가르쳐주었더니 금방 한글을 읽어나갔다 우리 한글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지금 정부의 공식 문자는 영어가 아닌지? 학교에서 학생들이 한문도 배우는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한국 공식 문자는 한글이고, 한문도 영어도 배우는데 지금은 한문보다 영어공부를 더 많이 한다고 했다.
그는 내가 가르쳐준 한글을 오후 내내 쓰고 읽고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레이몽은 그의 할아버지가 싱가포르에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중국에 대해서는 친근감은 가지고 있지만 자기의 조국은 싱가포르라고 하였다.
그는 또 일본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었다. 지금 일본과는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고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과거 일본인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자기는 일본에 대해서는 호감을 느끼는데, 자기 아버지는 일본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레이몽은 내일 페트라로 떠난다면서 자기가 묵을 여관 이름을 적어주면서 페트라에 가게 되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오후에 레이몽은 요르단 여자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나갔다.
저녁을 먹고 로비에 앉아 있는데 한국 여학생이 나를 찾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내가 나이가 많다고 외국에서도 일부러 찾아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참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또 한국 남학생 한 명도 찾아왔다. 그는 사우디에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다 하였다. 그는 내일 당일치기고 페트라에 갔다가 오려고 한다고 하였다. 그는 부산 사람인데 부산의 모대학교 학생회회장을 맡았었다고 했다. 그는 학생회를 이끌면서 순수학생운동만 했다면서 학교 생활, 학생회활동의 문제, 한국학생들의 의식문제,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생각을 말하였는데, 의지가 굳고 학생회장 출신다운 카리스마도 보였다. 그는 겸손하면서 앞뒤가 분명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중간에 한국 젊은이 두 명이 더 참여했다.
젊은이들과 만나면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시원하고 활기차서 좋다. 그들의 패기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늙은 몸이지만 그들에게 못난 추한 모습은 보이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내 자신을 잘 가다듬어야겠다.
오늘 저녁에는 젊은이들과 기분 좋은 이야기를 나눠서일까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다음사진은 사해(死海 : dead sea)
다음 사진들은 암만에서 찍은 것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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