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의 젊은이가 세계를 헤매다 <115>인도 - 푸리(Puri)
푸리(Puri)
2006년 3월 9일(목) 맑음
8시 50분에 check out하려니까 어제 아침 7시 30분에 들어왔으니 1시간 20분이 오버되어서 요금 10루피를 더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어저께 너는 아웃타임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보통 다른 곳은 11시인데 여기는 너무하다.”라고 했더니, ‘미안하다면서 규정이 그렇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요금을 더 지불할 수 없다고 하였더니 고개를 끄덕이기에 미안하다면서 그냥 나왔다.
푸리(Puri)행 버스(25루피)는 ‘State Huseum’ 앞에서 9시에 출발하였다. 뿌리로 가는 길은 어저께 동굴 사원 가던 길이라서 낯이 좀 익었다. 시내를 빠져나가니 전형적인 농촌풍경이 전개되었다.
들판에 벼를 재배하는 논이 중심이었다. 벼가 많이 자란 곳이 있는가 하면, 모내기를 하는 곳도 있고 추수가 끝나서 황량한 들판으로만 남아 있는 곳도 보였다.
버스는 10시 40분경에 푸리에 도착하였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하자 삐끼들이 몰려들었다. 외국인이 나밖에 없어서 나에 대한 쟁취전이 벌어졌다. 나는 그게 싫어서 그들이 잡는 것을 뿌리치고 한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한 놈이 따라 들어오더니 ‘차이를 시키겠느냐?’하고 묻기에 종업원인 줄 알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밖으로 나가서 차이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왜 밖에서 가져오느냐고 했더니 ‘노프로블램’이란다. 음식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까 이놈이 따라붙으면서 오토릭샤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걸 타고 여관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삐끼는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먹이로 눈독을 들였다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그가 불러온 오토릭샤를 타고 가면서 “오늘은 이놈에게 얼마나 어떻게 당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는데,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무슨 사원이고, 또 여기는 기차역이며, 이리로 가면 비치가 있고 저리로 가면.....’ 라면서 주절대는데 대꾸할 맘이 내키지 않아서 건성으로 들어주었다.
비치 부근 어느 여관 앞에 내려서는 “이 여관은 값이 싸고 좋은 곳이다.” 라고 하기에 나는 내가 가려던 여관이 있어서 그리고 가겠다고 하였더니 이 녀석이 난색을 하면서 통사정을 하였다. 하도 그 모습이 진지하고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금에 손해를 보더라도 그 여관(Sri Balasee Lodge-250루피)에 들기로 했다.
짐을 풀고 한잠 잤다.
여관에서 나와 기차역을 찾아가보았다. 내일 저녁 꼴까따로 가는 밤차를 타기 위해서 길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걸어서 가기에는 먼 거리였다.
역에서 바닷가로 갔다.
푸리의 해안도 눈이 다하지 못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바다는 언제 보아도 좋다. 파도를 보면서 넋을 놓고 있는데 누가 와서 툭 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시꺼먼 여인이 바구니 속에 가득 담아 놓은 야자수 껍질을 땅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바구니에 담으면서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 직전에 야자수를 하나 사서 먹었는데, 야자수 장수가 그 껍질을 주워가지고 갔다. 그것을 여인들에게 주면서 내가 먹은 것이라고 가리켜 주고는 여인들을 나에게 보내어 청소비를 물리게 한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1루피를 주었다. 여인들이 더 달라는 것을 못주겠다고 버텼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이래저래 인도인들에게 당하기만 한 날이었다.
인터넷 방에 가서 메일을 열어보았다. 안교장의 답이 있었고 ‘카페 별립산’에서는 리플을 많이 달아주었다.
오후에는 동쪽 해안 마을에 가보았다. 토착민들을 상대로 하는 상가에는 흙먼지가 보얗게 일고 쓰레기와 오물들이 널려 있어서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사람 사는 곳인데.... 뿌리의 그늘진 삶이 거기에 다 몰려 있는 것 같았다.
얼굴과 옷에 때 얼룩이 진 어린이 셋이 가방을 짊어지고 모자를 쓰고 가는 것이 귀여워 사진을 찍었다. 어린이들이 자기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내 디지칼 사진기를 보고 마냥 신기해하였다. 그들의 엄마로 보이는 여인들이 와서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서 부쳐달라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 거리를 빠져 나왔다.
큰 거리로 나오니 한 중년의 남자가 가게에 진열해 놓은 옷을 보이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심심하던 차에 얘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지 하나에 100루피에 만들어 줄 테니 주문하라는 것이었다. 바지보다 팬티가 필요해서 주문하였다. 작업하는 모습을 찍었더니, 자기에게 옷을 맞췄던 일본인이 보낸 편지를 보이면서, 사진을 우편으로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2006년 3월 10일(금) 맑음
선물이 될 만한 그림을 판다는 Marine Pde로 갔다. 덥기는 하지만 한 시간을 걸어서 갔다.
은행이 보이기에 환전 할 수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가 외출한 담당 직원이 곧 돌아온다기에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는데도 나타나지 않아 환전도 못하고 그냥 나왔다. 환전하려 왔던 다른 서양인도 따라 나왔다.
Marine Pde에는 기념 가게가 몇 개가 있는데 시원찮아 보여서 기념품 구경하는 것은 포기하고 바닷가로 갔다. 바닷가에는 현지 피서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깃발을 든 사람을 따라 행렬을 지어 질서 정연하게 해안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푸리의 사원과 성지인 바다를 순례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바닷가를 돌아 나갔다.
나는 물이 드나드는 모래를 밟으면서 서쪽으로 가다가 되돌아 여관이 있는 동쪽으로 걸었다. 파도가 거칠었다. 바다 저쪽에서 일렁이며 몰려오던 파도가 해안에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높이 치솟아 올라서 밀려오다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모래밭으로 기어 올라왔다가는 밀려나가곤 하였다.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물가를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과 모습이 다른 나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Marine Pde의 바다 앞을 지나자 모래밭이 급경사진 곳이 많고 파도의 모양도 불규칙하였다. 사람들도 뜸했다.
거기서 어떤 영감이 웃통을 벗은 채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말을 걸었다. 자기는 오리싸 사람이라면서 동북쪽 어촌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은 오리싸 사람들이 아니고 안다만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 하였다. 그리고 내가 묵고 있는 여관, 다음 행선지 그리고 나의 신상에 대하여 시시콜콜 물었다. 그리고는 자기는 옷가게를 하는데 거기 가서 구경만 하고 가라는 것이었다.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꾀나 먼 거리를 걸었다. 그와 얘기하면서 오느라고 지루한 줄 몰랐다. 내가 묵는 여관 가까이까지 와서는 지금까지 동행해 줬는데 점심값을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같이 걷자고 했나? 지금까지 같이 걷으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돈을 얻으려는 수작이었다. 5루피만 주었다. 6km나 같이 동행해 주었는데 겨우 5루피밖에 주지 않느냐면서 표정이 달라졌다.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그렇게 다라질 수가 있는 건지....... 여하간 그는 되돌아갔다.
그와 헤어지고 조금 더 걸어가는데 한 여인이 갑자기 모래밭을 가로 질러 바다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어떤 남자가 쫓아와서 물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여인을 낚아채어 모래밭으로 끌고 나왔다. 여인이 굉장히 화가 나서 남자에게 대들고 남자도 여자를 구타하였다. 또 다른 남자 하나가 나타나서 여자를 물에서 건저올린 남자를 구타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온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싸움을 말리다가 물에서 여자를 건저올린 남자를 집단으로 폭행을 하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도 없고, 이방인인 내가 그 앞에서 구경을 하고 서 있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서 외면하고 돌아서서 빠른 걸음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 여인은 왜 물 속으로 뛰어들었을까
그 여인을 물에서 끌고 나온 남자는?
여자를 건저올린 남자에게 덤벼들어 싸운 남자는?
여자를 건저올린 남자를 집단으로 구타한 사람들은? ............무슨 일로 여자가 물속으로 뛰어들었으며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궁금증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어저께 팬티를 맞췄던 집에 가서 바지를 하나 더 맞췄다. 100루피를 80루피로 깎아주었다. 아마 그들은 내게 큰 바가지를 씌웠을 것 같다. 낮에 해변에서 만났던 영감의 말이 생각이 나서 재봉사에게 이곳 사람들은 오리싸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였다. 자기도 안다만 사람이라 하였다.
재작년 쓰나미로 큰 타격을 입었던 안다만 얘기를 했더니 자기네 일가는 오래전에 모두 이곳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잘 모르지만 자기가 살던 곳 사람들이 많이 죽고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슬프다고 했다.
저녁 9시경 여관을 나와서 싸이클릭샤(15루피)를 타고 기차역에 가서 꼴까따 행 열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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