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 열차(2)
시베리아 횡단 열차(2)
(10월 2일)1시 50분에 239호 열차가 이르쿠츠크 역에 도착하였다. 우즈베크스탄의 젊은이 3명(YpyHбAEB шyxAT, ISOQ KAPUMOB, urunбDev JoxoЛ햑)과 함께 꾸페의 같은 칸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 젊은이가 내 침대는 2층인데 늙은 나를 보더니 자기가 2층으로 올라가겠으니 나보고 1층에서 자라고 권하여 그렇게 했다.
날이 밝아 오기에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즈베크 인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어서, 나는 그들이 일어날 때까지 눈만 감고 잠자리에 있다가 9시경(한국시간)에 우즈베크 인들과 같이 일어났다. 그들은 푸짐하게 아침 식사를 장만하여 나에게도 권하였다. 그들은 나에 대하여 무엇이 그리 궁금한 것이 많은지 묻고 또 묻는데 무엇을 묻는지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르쿠츠크에서 3개월 간 건설노동을 하였는데 일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하였다. 얼마나 벌어가지고 가는지 표정이 밝았다. 그들은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내려 비행기로 귀국한다면서 비행기로 귀국하는 것이 마냥 자랑스러운 것 같았다.
우즈베크스탄의 젊은이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Joxongir가 내 MP3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귀국하여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데 내 MP3를 얻어서 자기 동생에게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필요로 하는 자료를 많이 입력해 놓아서 주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 하나 사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차창 밖에는 자작 나뭇잎 노란 물결이 온 대지를 뒤덮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의 노란 물결에 내 마음까지 노랗게 물드는 것 같았다.
저녁 8시 경에 표정이 밝고 다정다감하던 우즈베크 인들이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내렸다.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그들은 나를 껴안으면서 이별인사를 오랫동안 나눴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거구의 러시아 남자 두명이 올라왔다. 그들은 새벽 일찍 하차한다면서 소등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바로 옆 객실에 탄 L양을 데리고 K양이 탄 객실로 가다가 이북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 20~40대의 청장년들이었다. 우리들을 먼저 소개하면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하고 인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더니 한 사람이 악수를 하면서 응답해 주니까 다른 사람들도 손을 내밀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그들 자리에 앉기를 청하였더니 무척 어색해 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들이 않은 자리의 사이를 따고 들어앉았더니 내 행동이 우스웠던지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한 젊은이가 미국과 남한 지도자들에 대하여 속사포처럼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 비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주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듣고만 있다가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남쪽 사람들이 수긍할 수없는 말도 있다고 응답해주었다. 그랬더니 또 다혈질의 한 사람이 “공화국은 천국”이라면서 “미국으로부터 남조선이 빨리 해방되어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우리가 그런 말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더니 자연히 다른 얘기를 하게 되었고 분위기도 부드러워졌다. 그들은 우리의 신분과 배낭여행에 대하여 무척 궁금해 하였다. 더욱이 미모의 L양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남한이 북한보다 잘 산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남한 사회에 대한 궁금증도 나타내면서도 묻는 말은 아꼈다. 한편 그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사슬에 얽매인 것 같았다. 그들의 언동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사진 찍기를 꺼렸다. 그들과 1시간 이상을 같이 앉아서 서로 인간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이 열차를 탄 북한 노동자들은 모두 40여명인데 모스코바 일대의 건설노동자로 선발되어 간다고 하였다.
(10월 3일)모스코바 시간으로 4시 30분에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하였다. 플랫폼에 내려서 아침 공기를 쐬면서 걷기 운동을 하였다. 북한 사람들도 플랫폼에 내려서 담배도 피우고 바깥바람을 쐬기도 하였다.
노보시비르스크 역 (뒷 모습만 보이는 사람들이 북한 노동자들)
북한 사람들이 가슴에 달고 있는 김일성 뱃지
옴스크에서 40분간 정차한다고 하여 역사(驛舍) 밖으로 나가 보았다. 역전 광장 중앙에 레닌 동상도 보였다. 역전을 돌아다니면서 사진 몇 장 찍고 열차로 돌아왔다.
옴스크 역전(사진 정중앙에 사람 뒤에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 레닌 동상임)
L양과 같이 식당차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북사람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하였는데 한 사람이 이북 제도의 장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자기들은 행복하다고 하였다. “남쪽 백성들도 ‘원수님의 그런 은혜’를 함께 누렸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라고 하면서 세뇌 교육을 실시하려들었다. 그냥 들어주기만 하고 내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식당차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고 각기 자기 객실로 돌아갔다.
(10월 4일)모스코바 시간 03시 05분에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에 도착하였다. 40분간 정차한다고 하여 열차 밖에 나가보았다. 보통 추운 날씨가 아니었다. 아래층 젊은 부부가 여기서 내렸고, 다른 등치 큰 젊은이 둘이 다시 들어왔다. 역 홈을 거닐면서 새벽의 맑은 공기를 쐬려다가 너무 추워서 쫓겨 들어와서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아래층 젊은 부부
우랄 산맥을 넘어 유럽지역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노변에 넓은 농장과 인가들이 좀더 큰 규모로 나타났다. 수목들은 시베리아나 이곳 유럽지역이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자작나무가 대종을 이루면서 침엽수들과 섞여 나타났다.
중간에 어떤 역에서 아래 층 남자 2명이 내리고 다시 젊은 여인 2명이 들어왔다.
어둠이 내릴 무렵 꽤 큰 도시를 지났는데, 차창 밖 거리를 내다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복장은 두터운 옷차림이었다. 나뭇잎이 없는 나목들도 많이 보였다. 키로프 역에서 정차시간이 길어 플랫폼에 내려갔다. 북한 사람들도 많이 내려서 담배를 피우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래층 여인들은 조심스레 나를 배려하는 것 같았다. 모스코바 시간 9시에 소등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10월 5일)침대가 이층이라서 여간 답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대로 나흘 밤을 열차에서 잘 버텨냈다. 지난 저녁에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뒤적이면서 읽으려 했으나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고 다시 자리에 누워 눈만 감고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아침 9시가 훌쩍 지난 다음에 깨어났다.
객실 복도에 나갔더니 옆 칸의 러시아 영감 내외가 나와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승차하여 5일 밤낮을 열차에서 보냈다. 그런 탓인지 노상 복도에 나와서 어슬렁거리고 다녔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지만 만나면 서로 눈인사를 나눠왔다. 그렇게 자주 만나다보니 서로 친숙한 느낌이 들었던지 영감이 내 옆을 지날 때면 그 큰 배로 나를 툭 치고는 황소 웃음을 짓곤 하였다. 모스코바에 가까이에 와서 서로 헤어지는 아쉬움 때문에 사진을 함께 찍었다. 그리고 귀국해서 그에게 보내주기로 하였다.
열차를 치타에서 승차한 영감 부부와
11시 :03분에 모스코바에 도착하였다.
북한 사람들이 역 홈 바깥의 한 귀퉁이에 집합하여 인원 점검을 받고 있었다. 그들의 행색을 보면서 우리 남한 사람들이 70년대에 사우디와 이란 등으로 노동을 팔아 외화를 벌어들이던 때가 연상되었다. 70연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 남한이 북한보다 못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10월 유신 독재 정권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국민들의 경제적인 삶의 질이 향상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과는 반대로 경제 발전이 정체현상을 나타내고 하강곡선을 그었다고 한다. 그리고 90년대에는 아사자들이 속출하하는 극한 상황을 겪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북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니 하루 속히 북한 사람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말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들은 모스코바 건설 현장에 5년 계약으로 왔다고 한다. 5년을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서 건설 노동에 투입된다니... 지금 남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들의 노임은 대부분 나라에서 챙기고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은 극히 일부밖에 되지 않는다니... 북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그들이 모여 있는 곳 가까이 가서 모두 몸조심하고 건강하게 가족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인사를 하고 모스코바 지하 전철역으로 내려갔다.
내가 처음 만난 모스코바 역 광장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코바까지 장장 9,198㎞를 달려왔다. 이렇게 하여 내가 꿈에 그리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드디어 실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3일 밤낮, 이르쿠츠크에서 모스코바까지 4일 밤낮을-
냉전 체제하에서의 나의 젊은 시절에는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나에게는 참으로 감개무량하고 벅찬 꿈만 같은 여행이었다. 감격스러운 열차 여행이었다.
모스코바 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