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및 기념관

운현궁(雲峴宮)

어르신네 2013. 4. 15. 01:24

 

운현궁(雲峴宮)

2013.4.11(목)

오랜만에 고교 동창들과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북촌 일대를 소요(逍遙)하였다. 우리의 학창시절, 한방에서 같이 자치하던 친구들이 고교시절에 우리들이 자주 다녔던 길을 찾아 걸어보자는 제의가 있었다. 그래서 창덕궁 담을 끼고 올라가서 중앙고등학교 앞길을 따라 계동 현대 사옥 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운현궁을 찾아들어갔다. 내가 학교 다닐 무렵에는 별 관심 없이 운현궁 옆을 지나다녔던 것 같았다.

운현궁은 조선 26대 고종의 잠저(潛邸)로서 생부 흥선대원군의 집이다. 흥선대원군이 10여 년간 어린 고종 대신 이곳 운현궁에서 섭정을 하였던 곳이다.

 

 

운현궁(雲峴宮)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의 내용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운현궁의 봄을 읽은 지 너무 오래 되어 그 내용이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흥선대원군은 촌수가 좀 벌어진 왕족으로서 살림도 궁벽하였고, 못난 망나니 같은 행동으로 인하여 세도가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로부터도 조롱을 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왕손들은 뜻하지 않게 역모에 걸려 애매하게 희생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기 때문에 종친들의 처신이 힘들었었다. 흥선대원군의 그런 못난 행동은 역모에 몰리지 않으려는 의도된 행동으로 그려졌다. 그렇게 흥선대원군은 계산된 행동으로 망나니처럼 행동하면서 조심스럽게 세월을 보냈다. 철종이 죽자 은밀히 조대비를 찾아가서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왕계(王系)를 이어가도록 하는데 성공하여 권세를 잡게 된다. 그리고 안동 김씨들의 세력을 몰아내고 철권정치를 행한다.

‘운현궁의 봄’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나라의 근대화의 길을 막았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무방비 상태였던 우리나라의 갑작스런 개방을 염려하여 점진적인 개방으로 정책을 펴나가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전개한 것으로 기억된다.

“운현궁의 봄”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운현궁의 중요한 건물들로는 수직사(守直舍)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로堂) 등이 있다.

 

수직사(守直舍)는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노안당(老安堂)은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곳으로 고종 즉위 후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 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이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을 단 수법은 그 시대적 특징이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공자가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 라고 한 <논어>의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대원군이 아들이 왕이 되어 자신의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과 노인들을 편하게 모셔야 된다는 치국(治國)의 이념을 갖고 있다.<출처 - 운현궁 소개자료>

 

 

 

 

 

 

 

 

 

 

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로 정면 10칸, 측면 3칸 규모이다. 1866년(고종3) 삼간택이 끝난 후 명성황후가 왕비 수업을 받던 곳이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은 초익공 양식의 사대부가 건축미를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문양(불발기창호)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붕이 용마루를 받치고 있는 중도리에는 용문양이 그려져 있어 건물의 권위와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운현궁 낙성식에 참여했던 고종이 대제학 김병학(金炳學)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기념할 것을 지시했던 사실만으로도 노락당이 상징하는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병학은 노락당이 높아 하늘과의 사이가 한자 다섯 치 밖에 안 된다고 했는데,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의 권세가 천하제일이었다는 것을 잘 나타낸 표현이다. <출처 - 운현궁 소개자료>

 

 

 

 

 

 

 

 

 

 

이로당(二老堂)은 1866년 노락당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치러진 이후, 노락당을 안채로 사용하기 어려워지게 되어1869년(고종6년)에 새로운 안채로 이로당을 짓게 되었는데 정면이 8칸, 측면이 7칸으로 되어 있다.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물로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자들만 살 수 있게 별도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철저한 금남지역으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미음(ㅁ)자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이로당의 안주인은 운현궁 천체 안살림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출처 - 운현궁 소개자료>

 

 

 

 

 

 

운현궁의 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