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네 2013. 11. 21. 22:03

덕수궁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광해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명전을 비롯해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선원전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설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 들었으며, 1933년에는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이처럼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이었다.

 



 대한문 위병들

  


 덕수궁 중화전 앞길

 

 

 

중화전 일원

 

 중화전 약


  중화문(보물제819호)

 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되었으며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있다.

 

 

 

 

중화전(中和殿)

1902년 임시정전으로 쓰던 즉조당(卽祚堂)남쪽에 행각을 두르고 중화전을 건축해 구궐의 중심역역으로 삼았다.중화전은원래 중층 건물이었으나, 대화재로 이 일대가 모두 불타버린 후, 1906년 단층으로 그 규모를 줄여 재건하였다.주화문과 행각도 함께 세웠는데, 현재 행각은 동남쪽 모퉁이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그 앞 마당인 조정(朝庭)은국가 의례를 치르기 위한 상징 공간이다. 2단으로 월대를 마련하고 바닥에 박석을 깔았으며 품계석과삼도를 설치하는 등,전통 궁궐 격식을 따랐다. 


중화전



용상

 중화전의 내부와 용상

중화전은 덕수구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 조례, 외국사신 접견 등 주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루는 곳이다. 1904년 소실된 후 1906년에 단층으로 중건되었다. 정전 내부에는 집 속의 집이라는 의미의 '달집'이 있는데 그 안에 왕께서앉으시는 어좌가 있으며,그 뒤로는 '세 번 꺾인다'하여 '삼절곡병'이라 하는 병푸이 놓여 있으며, 맨 뒤에는 와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도'가 비치되어 있다. 오악이란 우리나라의 오방위의 주요한 산들, 즉 전 국토를 의미하며, 태양과 달 소나무 등은 천계,지계 와 생물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왕의 권한이 미치는 모든 곳과 모든 것들이 왕의 아래에서 자손 만대로 번창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더불어 왕실의 무궁한 번영과 번창을 기원하는 것이다. 어좌 바로 위로는 용 한쌍이 있는데 이는 정전의 천정에 있는 용과 같은 모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제의 왕궁이었음을보여주고 있다.

 

 

 

석조전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에서는 최초로 유럽풍의 석조로 건립된 건물이며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으며 영국인 "데빗손" 감독 하에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으며, 특별한 건물명칭은 없이 "석조전"으로만 전해 온다. 고종(高宗)황제는 이곳에서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거나 침전으로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8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했고 1948년~1950년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엔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건물일부가 파괴되어 1955년 육군공병단에 의해 수리되었으며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기도하였다.

 

 

 

선원전(璿源殿)터  

앞에 보이는 숲은 돈덕전이 있던 곳이다. 준덕전은 순종이 즉위한 서양식 건물이었는데 1922ㅓ년 궁역해체와 동시에 관통도로가 생기면서 철거되었다. 그 위 담장너머로 건원전 일원의 궁역이 있었다. 선원전은 태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곳으로 1900년에 숙종을 비롯한 7위의 조상을 모셔서 황상이 격을 갖추었다.그 일대는 초상 때관을 모시는 빈전(殯殿)이 있어 황실의 재례를 지내던 곳이다. 옛 경기여고 와 현 덕수초등학교 일대를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지만 1920년대에 궁역이 해체되었다. 현재 경기여고 터에 신원전을 비롯한 덕수궁 복원 작업이 준비 중이다. 외쪽 담장 너머로 미국대사관저 서쪽에중명전(重明殿)을 위시한 일원의 또 다른 궁역이 있었다. 왕실 도서관으로 사용했던 중면전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기타 부속 공간들오 사용했던 위의 다른 건물들은 궁뎍 해체와 함께 없어졌다.   


 





 

즉조당(卽祚堂)일원

이 일대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거처했던 전각들을 보존한 곳이다.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왕위에 오른 곳이고 석어당은은 선조가 거쳐하다가 승하한 유서깊은 건물이다. 석어당은 현존 유일의 목조 2층집으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소박한 살립집 같다. 1623년 대부분의 전각과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으나 이 두 건물만은 보전하여 경운궁의 상징으로 삼았다. 준명당(浚明堂)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즉조당과 복도로 연경되어 있다. 현재의 세 건물은 1904년 불에 탄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석어당


석어당(昔御堂)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고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중건하였다. 덕수궁의 유일한 목조중층 건물로 선조(宣祖)께서 임진왜란 중 의주로 몽진하셨다가 환도한 후 이곳에서 거처하셨고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인목 왕후가 광해군에 의해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光海君)을 석어당 뜰아래 꿇어앉히고 인목왕후가 죄를 책한 곳 이기도하다.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상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浚明堂(좌)과 卽祚堂(우)

 

준명당

이 건물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종(高宗)때에 중건된 것으로 추측되는 목조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고종이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며 높은 기단위에 세워졌다. 좌우 툇간에 쪽마루를 두고 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즉조당

 준명당(俊明堂)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光海君)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 환궁 직후 정전으로 이용되기도 하여 한때 명칭이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손실된 것을 그해에 다시 석어당, 함녕전과 같이 중건한 것이다. 고종의 후비인 순헌귀비 엄씨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거처하셨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정관헌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동서양 절충식 건물은 고종황제께서 다과회를 개최하고 음악을 감상하시던 곳이며 한때 이곳에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였다.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하였으며, 로마네스코 양식의인조석 기둥을 줄지어서 내부공간을 감쌌고 동서남 세 방향에 베란다를 마련하였다. 규모는 정면 7칸, 측면 5칸으로 내·외진으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내진 공간 위에는 팔작지붕이 덮여있고 외진공간은 차양칸처럼 된 특이한 형태이다.

외진에 두른 철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 전통문양을 넣었다.





 


 

함녕전(咸寧殿)과  덕홍전(德弘殿)

함녕전은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으로 1919년에 이곳에서 승하하셨다.1904년에 화재로 소실된 후에 다시 지었다. 대청마루 양 옆으로 온돌방을 들였고, 사방 퇴간에방을 두른 전형적인침전 건물이다. 함녕전 뒷편에는 계단식 정원을 꾸몄고, 전돌로 만든 유현문(惟賢門)과 장식적인 굴뚝을 설치했다.



함녕전과 덕홍전

 

함녕전(보물제820호)

 :1897년 건립되었으며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4월 14일 함녕전 온돌수리공사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는 큰 화재가 있었는데 이 건물은 같은 해 12월에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이곳에서 승하하셨다.  

함녕전

 

덕홍전

 함녕전을 침전으로 사용할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하였다.

용도는 주로 외국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건물이다.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깝다. 이 건물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만이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있다.  

덕홍전

 

 

 

 덕수궁 연못







 


 

 

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