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네 2015. 11. 8. 00:04

 

 

2015.11.06(금)

오늘은 경교장을 찾아 김구 선생의 행적을 더듬어 보았다. 

1945년 제2차대전에서 패전한 일제로부터 조국이 해방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으로부터 환국하여 임시정부가 활동한 공간이 바로 경교장이었다. 그리고 경고장은 김구 임시정부 주석과 오랜 기간 망명생활을 하느라고 국내에 거처할 곳이 없어진 임정 요인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었다. 1945년 11월에 환국한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경고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경고장에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회를 지속하였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남북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활동하셨을 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고 김구 선생의 목숨을 노렸으나 실패하였다. 그런데 적군이 아니라 해방된 조국에서, 남북이 단결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분투하시던 중,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애통하게 서거하셨다. 선생의 서거는 온 겨레가 망연자실하여 고 땅도 하늘도 울었다. 나라의 큰 별은 지고 결국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일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아 오신 선생의 높은 뜻과 커다란 발자취는 우리 겨레의 미래를 밝혀주는 영원한 빛이다. 전쟁으로 나라 잃고 고향을 떠나 살아야 하는 난민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 오늘날 전쟁의 고통을 겪는 중동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이 조국을 탈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안전지대를 찾아 유랑하는 뉴스를 접할 때면 100년전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했던 당시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일제가 악랄한 방법으로 한민족을 탄압하고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여 농민들의 논밭을 수탈하였고 나라의 보물을 갈취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많은 사람들이 조상의 뼈가 묻혀있고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을 등지고 남부여대하고 살길을 찾아 중국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에서 유량해야 했던 아픈 역사를 잊을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많은 것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많은 애국자들의 애국심을 배우고 그 거룩한 뜻을 받을어 기리고 흠모하야 다. 경고장을 나서면서찾아뵈어야 할 분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늦게야 찾아뵈면서 미안함을 느꼈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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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혈의

 

 

 

 

2층 응접실(서재)

임시정부 요인 숙소

김구 선생 거실(집무실)

응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