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30. 다질링(3)

어르신네 2016. 2. 19. 15:13

30. 다질링(3)

-------<다질링이여, 안녕>------

 

2005년 2월 21일(월)맑음 오늘은 다질링을 떠나 꼴까따로 가는 날이다.

밤새도록 바람이 불더니 아침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커튼을 얼여보니 카첸중가가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금빛 설산을 바라보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아침은 역시 춥다. 해발 2150m이나 되는 고산지대라서 바람이 세차게 불고 기온이 많이 내려간 모양이다. 이침 일찍 티베트 난민촌을 방문하고 오면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려했으나 거의 모든 가게가문을 닫았다. 아마 월요일은 휴업을 하기로 약정된 것 같다. 그래서 우선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하고 짐을 챙겨놓고 샤워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의 자리에 앉아서 설산 카첸중가를 마지막으로 길게 바라다보면서 길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래도 막상 다질링을 떠나는 아쉬움이 컸던지 자꾸 창문을 통하여 바라다 보이는 설산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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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엘라는 아침 일찍 떠나고 없었다. 우리가 묵고 있던 곳이 가장 높은 층이라서 작별인사가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아내는 마리엘라와 작별인사라도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운지 그녀가 묵었던 방문을 몇 번이나 열어보곤 하였다.

프런트에 내려오니 주인 마담이 나와 있었다. 마담의 인상이 좋고 손님들에게 친절하였다. 일일이 방을 점검하고 종업원들을 잘 다스려서 친절을 베풀도록 하였다. 그녀는 티베탄이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실내 장식물이 대부분 라마 불교와 관련이 있고 매인 룸에 부처님 그림이 방의 중심부에 놓여 있었다. 우리 부부가 아침에 Tibetan Refughee Self Help Centre에 다녀와서 기부금 영수증을 보여 주었더니 고맙다고 두손을 모아 인사를 하였다. 우리가 여관을 떠날 때 그녀는 비단으로 만든 목도리를 하나씩 주었다.

우리는 Dekelling Hotel에서 나와 지프 스탠드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데 Siliguri행 지프를 만나서 쉽게 승차하였다.

차도가 좁고 마주 오는 차와 교행을 할 때에는 아주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길 아래를 내려다가 보니 까마득한 절벽이고 산모퉁이를 계속 이리저리 돌면서 갈지 자(之) 형태로 난 길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침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팠다.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 실리구리로 오는 산간 중턱에 있는 간이 휴게소에서 점심식사로 만두를 시켜서 먹었다. 

다질링 일대가 모두 고산지대인데 산 중턱 곳곳에 소도회지가 형성되었다. 다질링에서 내려올 때부터 3시간 정도를 경과할 때까지 차로 변에 인가가 끊이지 않았다. 아마 산간에서 재배하는 차(茶)의 생산이 그들의 주업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산길을 따라 인가가 계속되다가 산중턱에서부터는 인가가 없고 평지에 이르는 곳까지 울창한 산림이 조성되었다.

 

2시 50분경 실리구리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뉴잘페구리까지의 이동수단으로 사이클 릭샤를 이용하였다. 실리구리에서 뉴잘페구리로 오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이 일으킨 먼지가 길을 가득 메워 눈을 뜨기가 곤란하였다. 맞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이클릭샤를 힘들게 하였다.

아내는 오토릭샤를 타지 않고 자전거릭샤를 탄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였다. 자전거 릭샤는 자리도 불편하고 속도도 느리고 특히 앞에서 힘겹게 자전거를 모는 가냘프고 여윈 릭샤왈라의 모습이 안타깝고 애처로워 어떻게 타고 가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내려서 걸어가면 안 되느냐고 하였다. 나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그냥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이놈의 릭샤왈라가 뒤를 돌아보면서 1인당 50루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분명히 1인당 30루피라고 하여 탔는데........ 그러면 우린 내리겠다고 했다. 우리말은 들리지 않는지 그냥 힘차게 페달을 밟는 것이었다. 우린 내려서 다른 것 탈거야. 내릴 거야, 세워! 그래도 못들은 채하고 앞만 보면서 달린다. 뼈에 살가죽을 살짝 발라 놓은 것 같은 야윈 몸뚱어리로 자전거를 모느라고 허우적대는 모습이 너무 가련하게 생각되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더니 또 뒤를 돌아보면서 이번에도 또 일인당 50루피라고 손 신호를 보낸다. 가련하다는 생각이 싹 가신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검은 얼굴에 그 큰 눈의 흰자위 가운데 검은 눈동자가 총알처럼 내 망막에 꽂혔다. 악마의 눈처럼....... “아니야, 일인당 30루피!”하고 나도 큰 소리를 지르고 우리에게 고개를 돌리는 그의 눈을 향하여 노기의 눈총을 쏘았다. 무슨 소리인지 중얼대면서 앞만 보고 달린다. 바람이 먼지를 몰고 우리를 덮친다.

자전가가 나가질 못한다. 릭샤왈라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애쓰는 모습이 여간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또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어느덧 뉴잘페구리 역사에 도착하였다.

릭샤왈라에게 60루피를 주었다. 100루피 달란다. 우리는 일인당 30루피를 약속하였다 더 줄 수 없다. 내가 계속 버텼더니 20루피만 더 달라고 사정을 한다. 아내가 ‘20루피면, 우리나라 돈으로 1000원도 안되는데 그냥 주자.’고 하였다. 나는 아내에게 ‘인도에서는 현지 사정에 맞춰 인도 돈으로 예산을 짜가지고 다니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자전거 릭샤왈라에게 10루피를 더 주었다. 더 달라고 계속 손을 내민다. 그 눈빛을 보니 애절해 보인다. 내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주머니 속에서 10루피를 꺼낼까말까. 아니야, 거절할 때는 단호하게 해야 해! 내 뒷사람을 생각해서 더 주면 안돼! 여기는 인도야! 나는 냉정하게 손을 내젖고는 역사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그 자리에 서서 멀거니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자전거 릭샤왈라에게 내가 너무 인색했나? 아직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로 가서 주머니의 10루피를 건네주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꽉 차있었지만 발걸음은 이층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여객대기실에 들어갔을 때 오후 3시 40분이었다. 우리가 타고 갈 기차는 저녁 7시 40분이다. 앞으로 4시간이란 지루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여행은 무던히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시간을 자로 잰 듯이 맞춰서 다니면 더 없이 좋겠지만 낮선 외국에서 혼자 여행하는 사람이 대부분 그 지방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조그마한 실수라도 생기면 낭패를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미리미리 대비하다가보니 이렇게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그때 생기는 문제를 즉흥적으로 잘 풀어나갈 수만 있으면 좋겠으나 그런 센스를 가지지 못해서 늘 이렇게 고생을 한다.

드디어 기차 탈 시간이 다 되었다. 우리가 승차할 플랫폼을 찾아가야 하겠는데,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역원에게 물었는데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플랫폼을 옮겨 다니느라고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하기를 여러 번..... 아내가 짜증을 냈다.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모두 받아줄 수밖에....... 차가 들어온 다음에야 겨우 우리가 탈 차를 찾아서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