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37. 꼴까따(9)

어르신네 2016. 2. 19. 17:24

37. 꼴까따(9)

2005년 2월 27일(일) 맑음 

그런데 새벽 2시가 되면 어김없이 잠이 깬다. 깊은 잠에 빠져 있어야 할 시간에 눈만 감은 채 잠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이슬람교의 확성기 소리가 시작되는 5시에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사를 보기 위해 어저께와 같은 시간에 나섰는데 성당으로 가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다. 혹시 일요일 아침 미사는 없는 것은 아닌가? 성당 가까이 갔는데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벌써 미사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더니 시계가 5시20분에서 멈춰 있었다. 첫날 미사에 참석했을 때는 좀 어색했었는데 오늘은 좀 익숙해진 것 같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많은 외국사람들이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미사의식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거의 같은 형식으로 진행이 되니, 내용을 어느 정도 인식하면서 순서를 따라가는 것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미사가 끝나고 깔리가뜨로 갔다. 어저께 동행했던 프랑스 여인도 함께 갔다. 내가 유독 눈에 띠는지 나를 따라 다닌다.

오늘은 봉사인원이 눈에 띠게 적다. 병실에 또 새로운 환자가 들어왔다. 아침 식사가 없는 날이라서 그런지 과자를 사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주 끈질기게...... 원장 수녀님은 절대로 사주면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런데 경험이 많은 봉사자들은 과자를 미리 준비해 가지고 와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주기도 한다. 그러면 옆의 환자들이 너도나도 손을 내민다. 새둥지에서 먹이를 물고 온 어미를 향하여 목을 길게 빼고 주둥이를 벌리고 짹짹거리는 어리고 귀여운 새끼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식사를 하지 않아서 그런지 대변을 실수하는 환자가 적었다.

오늘은 늙은 스웨덴 간호사가 혼자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도왔다.

젊은 사람보다 굼뜨기는 해도 환자의 환부를 다루는 솜씨가 여간 능숙하고 꼼꼼하지 않았다. 그리고 늙은 간호사는 기운도 센 것 같았다. 간호사가 환부를 치료할 때 고통스러워 요동치는 환자를 간단히 제압해 버렸다. 깊은 상처를 가진 환자들을 보니 너무 참담하였다. 그녀는 살이 패여 달아나 뼈가 보이는 환자. 살이 썩어 고약한 고름덩어리가 흘러내리는 환자, 환부에서 풍기는 냄새가 역겨워 보기조차 어려운 환자들의 환부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차근차근 소독을 하고 치료하였다.

환자들의 치료가 끝날 무렵 한 환자가 내 바지가랑이를 잡았다. 얼굴을 돌리니 변 냄새가 얼굴에 끼얹혔다. 밑을 보니 침낭이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옆에 있던 젊은 일본인에게 도와달라고 하여 둘이서 그 환자를 욕실로 데리고 갔다. 잠깐 환자를 잡고 있으라고 하고 고무장갑을 가져오려고 나가는데 그는 당황해 하면서 사색이 되어버렸다. 아마 내가 환자를 자기에게 맡기고 도망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고무장갑을 가지고 돌아오니 안도가 되는지 굳었던 얼굴이 풀리면서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 환자의 오물을 씻어내고 목욕도 시켜서 침대에 눕혔다.

오늘이 나흘째 되는 날이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확실하지 않고 눈치로 일이 있으면 찾아서 했다.

내가 해야 할 몫을 정하여 하면 좋겠는데, 그것을 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장기간 할 것도 아니고, 고작 5~6일 정도 하고 갈 것인데, 어떤 일이든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 해야겠다.

11시가 되자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병실의 한 쪽으로 모였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병실의 한쪽 공간에서 미사를 집전하셨다.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냥 서 있거나 앉아서 미사를 지루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환자들 가운데는 평소에 시끄럽게 떠들거나 계속 지껄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 미사 시간에는 조용하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반성하면서 미사에 임했다. 나도 베풀 수 있다는 오만한 마음을 품고 온 것은 아닌지. 진심으로 이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남이 한다니까 나도 한 번 해보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수용자들이 가지고 있는 깊은 상처(겉으로 들어난 상처이든 마음의 상처이든)를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만약 내가 그들의 아픔을 내 것인 양 느끼지 못하였다면 나는 여기에 오만한 마음으로 와 있는 것이리라. 하느님께서 내 마을을 꿰뚫어보시고, 또 일깨워주시기를 기도드렸다.

오늘은 간식 시간이 없었다. 미사가 끝난 다음 환자들의 식사를 도운 다음 봉사자들에게 점심을 주었다. 닭볶음과 식사와 과자 짜이 식빵까지 나왔다. 오늘 점심식사는 푸짐하였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프랑스 여인이 나에게 와서 내일 프랑스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틀 동안 내가 안내자 노릇하였던 것을 생각하고 작별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이틀 동안 화사한 웃음을 보여주었던 예쁜 프랑스 여인을 내일은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서운하였다. 그녀는 영어가 아주 서툰 모양이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영어로 무엇을 물어도 머뭇거리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나도 영어로 의사표현을 하기가 어려워 그녀에게 말을 걸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였지만, 그녀도 나를 따라 다니면서 간단한 단어로만 묻고 대답할 뿐 말이 없었다. 그냥 눈만 마주치면 서로 웃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나를 졸졸 따라오던 예쁜 프랑스 여인이 한동안은 내 눈에 어른댈 것 같다.

여관에 돌아오니 아내는 먼저 와 있었다. 그동안 배탈이 나서 고생을 했는데 안색이 밝은 것을 보니 마음이 좀 놓였다.

아내가 젊은 사람들과 함께 시장에 나가서 닭 세 마리를 사왔다. 한국 젊은이들과 닭죽을 만들어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모두 맛있게 먹는 모습이 좋았다. 내일은 감자를 삶아먹겠다고 하여 내가 시장에 가서 30루피를 주고 꾀 많은 양을 사왔다. 외국에 나와서 음식을 나누어 먹으니 재미도 있고 오랜 지기처럼 친숙해졌다.

 



 

깔리까뜨

2005년 2월 28일 (월) 맑음

새벽미사를 위해서 5:40에 마더하우스 성당으로 출발하였다. 같은 여관에 든 서양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는데 내 다리가 짧아 따라가기가 숨찼다. 아침 미사를 마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볍고 깔리가뜨로 가는 발걸음도 빨랐다.


 아내는 목덜미와 눈가장자리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부기까지 나타나서 오늘은 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빵 배식소에 와 있었다. 책임 수녀님이 아내에게 오늘은 사회 부적응 여인들이 수용된 곳으로 가라고 권하여 스페인 여인들에게 딸려 보냈다. 그리고 가는 한국 사람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깔리가뜨로 가는 차들의 노선이 제 각각이다. 버스를 탈 때마다 내리는 장소가 달랐다.


 깔리가뜨의 NIRMAL HRIDAY 옆에 깔리 템플이 있는데 이곳은 염소 희생물을 바치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차에 염소를 싣고 많은 사람들이 사원 앞에서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앞에서 사원을 안내해주겠다는 사람들이 우리의 가는 길을 막아서면서 귀찮게 했다. 환자들의 집 앞에도 어린 아이를 업은 여인과 어린 거지들이 진을 치고 우리를 기다렸다.

며칠간 봉사랍시고 드나들기는 하였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형식적인 그리고 단 며칠간의 활동으로 의무를 다한 것인 양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겠다.


 전주(全州)에서 온 아가씨는 봉사활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 같다. 단 며칠간 지켜보았을 뿐이지만 그 마음 씀씀이나 행동이 여느 사람과는 구별되었다. 대부분 오전이나 오후 활동만 하고 돌아가는데 이 아가씨는 오전 오후를 모두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돌아온다. 천사가 따로 없다.

아내는 스페인 여인들이 친절하게 숙소까지 같이 와주어서 다행이었다. 기운이 좀 회복이 되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저녁에는 감자를 삶아먹겠다고 한다.


오후에 바라나시와 아그라 행 기차표를 사려갔었다. 두 번이나 갔던 곳인데 다녀보지 않았던 길을 어림짐작하고 들어섰다가 방향감각을 읽어 30여분 이상을 헤맸다. 겨우 기차표 예매처를 찾아 예매를 하려고 하니 루피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달러를 주고 샀는데 100루피는 손해를 본 것 같다. 같은 여관에 들어있는 일본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도 바라나시 행 기차표를 산다고 했다. 여관에 돌아갈 때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런다고 해 놓고는 내 바로 옆에서 예매를 하고는 금방 사라졌다. (고얀 놈.....)

저녁에는 감자로 끼니를 때웠다. 한국 젊은이들과 함께 감자파티를 했는데 성남 사는 아가씨가 3월 2일 귀국하기 위하여 뭄바이로 간다면서 맥주를 사가지고 왔다. 맥주와 감자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일본 청년이 넉살좋게 다가와서 감자를 함께 먹었다. 옆에 있는 서양 사람들에게도 권하였더니 나이 쫌 든 여인은 사양을 하고 한 사내 녀석은 덥석 집어서 껍질도 벗기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여행을 하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의 생각과 태도를 이해하게 되고 세계에 한걸음 다가서는 길이 되지 않을까

저녁에는 9시도 되지 않아서 잠자리에 들었다. 한잠 자고 났는데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여 귀을 기울이니 우리 젊은이들이 감자 파티가 끝나고 2차를 하는지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젊은이들이니까 그들의 젊음을 발산하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늙어서인가 그게 마땅치 않게 생각되니 한심한 늙은이가 될 수밖에 없다.

한편 다른 외국젊은이들과 대조해보면 우리 젊은이들의 놀이 문화가 부족한 것 같다. 먹고 마시는 일은 잘 하는데, 음악 악기를 다룬다거나 음악을 하면서 외국인들과 어울려 교감하는 모습을 이 프로그램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이제 꼴까다도 앞으로 이틀, 이틀이 지나면 또 생면부지의 땅으로 이동해야 한다. 두려움과 새로움이 그리고 호기심이 나를 자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