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바라나시(4)
43. 바라나시(4)
2005년 3월 6일 (일)대체로 맑음(-높은 구름>무척 더운 날씨였다.
새벽에 번개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밖에서 비 듣는 소리가 났다. 오늘 아그라로 이동하는 날인데 비가 오면 어설플 것 같다. 그런데 날이 밝아지면서 검고 두껍던 구름들은 물러가고 높은 구름 사이로 햇빛이 간간히 비치기 시작하였다.
오늘도 이른 아침에 다샤스와메드 가뜨로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벌써 보트에 몸을 싣고 아침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트가 상류로 행렬을 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수많은 인도인들은 물가로 내려가서 강물에 몸을 담그는 그 성스런 의식을 치루고 있다. 참으로 진지하고 정성스런 행사인 것 같다. 그런데 일본인 젊은이 하나가 그 대열에 참여하는 모습도 보여 이색적이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런 인도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에 여염이 없다. 강에는 수많은 보트가 상류 쪽으로 올라갔다가 길게 줄을 이어 하류로 돌아오는 모습이 장관이다.
가트에는 힌두교 사두들도 열을 지어 앉아서 무언가 할 일을 찾는 것 같고, 또 사람들 사이를 거지들이 헤집고 다니면서 관광객들을 성가시게 군다. 각종 장사꾼들이 무얼 사라고 달라붙는다. 우리부부는 솟아오른 해가 강물에 잠겨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연신 셔터를 눌렸는데 사물을 보는 안목도 무디고 사진기를 다루는 기술도 없어서 그림이 어떻게 담겨졌는지 모르겠다..
오전은 짐을 챙겨놓고 아그라에서의 일정을 점검하고 조정해 보았다.
11시40분에 체크아웃하면서 짐을 여관 사무실에 맡기고 옥상 테라스로 올라가서 점심을 시켜먹었다. 오후에는 황금사원 쪽으로 갔다. 황금사원으로 가다가 목각상회에 들려서 손녀들에게 줄 인형을 샀다. 그리고 황금 사원에 들렸는데 경계가 삼엄하다. 사원 안으로 힌두교인이 아닌 사람은 입장을 금하고 밖에서만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사원 입구에서 한 젊은이가 잘 보이는 곳으로 인도하겠다고 하여 따라갔더니 거기는 옷감을 파는 상회였다. 황금사원이 잘 보이는 곳에 상회를 만들어 놓고 황금사원을 보러오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곳이다. 우리는 상품을 들고 장황하게 설명하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상인은 닭 좇던 개처럼 우리가 내려가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었다. 좀 미안하였다.
황금 사원 구경을 하고 나오니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다. 기차역으로 나갈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았었다. 아내가 화장장을 다시 구경해보고 싶다고 하여 그리로 가기로 하였다. 그저께 아침에 보트 놀이를 마치고, 걸어 다녔던 길이라 쉽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강이 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갔다. 그런데 강이 있는 곳에 도착한 지점은 마르까르니까 화장장이 아니라 다샤스와메드 가뜨였다. 다샤스와메드 가뜨와 화장장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걸어서 가려고 하였더니, 어떤 한국 사람이 ‘지금은 화장을 하지 않더라.’고 말해서 우리는 다시 다샤스와메드 가뜨로 되돌아 왔다.
다샤스와메드 가뜨에서는 물청소 작업이 한창이었다. 축제일(8일)에 대비하여 청소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녁마다 실시하는 뿌자 의식에 앞서 주위를 깨끗하게 매일 그렇게 물청소를 하는 것인지..... 나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거닐던 가뜨라서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한 곳이 되었는데, 유유히 흘러가는 간지스 강물, 힌두교인들의 강가 순례행렬, 가뜨에서 벌러지고 있는 삐끼들과의 입씨름, 강가에서 혹은 어느 가정의 옥상에서 간지스 강 위 하늘 높이 띄워놓은 갖가지 모양의 연들이 하늘거리는 모습이 아련한 추억으로 밀려나는 순간이란 생각을 하니 좀 아쉬웠다.
5시경 여관에 맡겨놓은 짐들을 찾아서 오토릭샤를 타고 바라나시 정선역으로 갔다. 40루피를 주었더니 1인당 40루피라면서 80루피를 달라고 하였다. 나는 단호히 ‘only 40Rs!'라고 굳은 표정으로 소리치자 40루피만 받고 머쓱하여 물러났다.
오토릭샤에서 내려 바라나시 역으로 들어갈 때 어린 여자아이들이 따라오면서 돈을 달라고 집요하게 따라 붙었다. 대꾸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데 옷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주머니를 툭툭 치기도 하고 가방을 끓어 당기기도 하였다. 우리도 아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역을 향하여 걸었다. 그런데 어느 여자아이가 아내 가방에 매달아놓은 컵의 꼭지를 뗐다. 그리고는 그것을 아내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의자에 앉을 때 보니 내 바지 좌측에는 아주 기분 나쁜 끈적이가 붙어 있었다. 그들이 내바지에 묻혀놓은 것인지 다른 데서 뭍은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하여튼 돈을 주지 않았더니 그들은 그렇게 우리에게 골탕을 먹였다.
바라나시 정선 역에는 열차번호와 도착 및 출발시간 그리고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을 알리는 전자 시스템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한 곳의 플랫폼으로 내려가서 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6시 15분 도착 4863호 열차’가 들어오는 플랫폼인지 여부를 직접 확인해 보고 그곳이 아니면 다시 구름다리로 올라갔다가 다음 플랫폼으로 내려가서 확인하곤 하였다. 그러느라고 여러 개의 플랫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다리품을 팔았다. 그리고 열차가 도착한 다음에도 우리가 타야할 차량 번호 표시가 없어서 긴 열차를 끝에서 끝까지 찾아 헤매느라고 애를 먹었다.
바라나시를 떠나면서 아쉬운 것은 바라나시는 인도의 힌두교 성지로서 또 정신적인 고향으로서 힌두교 순례자들이 이곳에 와서 강거 강물에 몸을 씻고서 모든 죄를 다 씻어내는 종교 행사가 성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곳인데 그런 바라나시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삼사일을 머물면서 보면 얼마나 보았고 느꼈으면 얼마나 느낄 수 있겠는가. 바라나시의 참모습을 느끼려면 그들과 함께 하는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열차가 정확하게 6시30분에 바라나시 역을 출발하였다. 바라나시의 잔영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다샤스와메드 가뜨에서는 지금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인지, 강가에서 목욕하는 성스러운 의식 행렬이 내일은 어떤 형태로 이루질 것인지, 황금 사원으로 가는 길에서는 언제까지 소가 어슬렁거리고 다닐 것인지, 가뜨 남쪽 뒤, 좁은 골목길(Sonarpur Rd)에 사람과 소와 염소와 개가 어울려 있는 사이로 자전거 오토바이의 질주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메인 가뜨로 들어가는 큰 길(Godaulia)의 모든 차량과 자전거 인력거가 몰려 한꺼번에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모습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화장장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생에 대하여 무엇을 생각할 것인지............
8일에는 축제가 있다는데 사전에 축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아그라행 기차표를 예약해 좋지 않았을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오늘 떠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않은 열차의 좌석 앞에는 인도인과 영국인 부부가 앉아 있었다. 영국인 부부는 책을 보면서 조용히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67세 되었다는 인도인이 나에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무엇을 하느냐, 얼마동안 인도에 머물 것이냐, 한국은 지금 추운 때가 아니냐고 하면서 수다스럽게 묻는데 영어가 짧아 단어로 대답을 해주자니 민망했다. 하여간 인도인의 수다는 끝이 없고 나는 조름에 겨워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