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조드뿌르(1)
<조드뿌르>
2005년 3월 12일 (토) 맑음 .
조드뿌르에서의 문화재 관람은 Meherangarh만 하고 다음날은 하루정도 쉬면서 시내 구경이나 하다가 14일 자이살메르로 갈 예정이다.
여관에서 미국교포 아가씨를 만났다. 어려서 미국에 들어갔기 때문에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한다면서 미안해하고 반가워하였다. 미국 텍사스에 사는데 부모와 대화할 때가 가장 어렵다고 하였다. 그녀는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고 하였다. 그녀는 룸으로 들어가면서 즐거운 여행을 하라면서 깍듯이 인사를 하였다.
코시 여관이 구시가지 중심에서 서쪽 끝에 있어서 Clock Tour까지 거리가 멀고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서 나오려면 오토릭샤가 내뿜는 매연과 오토바이 자전거 짐수레 소 등이 정신없이 지나가면서 일으키는 먼지로 인하여 숨을 쉬기가 거북할 정도이다. 아내는 아연실색을 하면서 ‘왜 이런 곳에 방을 얻었느냐’고 또 원망을 하였다.
오늘은 Meherangarh만 구경하기로 하였다. Fort에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다.
아내가 힘들어하면서도 부지런히 따라서 오른다. 포트 입구에 표를 사가지고 올라갔다. 책에는 100루피인데 250루피로 올랐다.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마지막 문은 아주 가파로운 경사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데 굉장히 견고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문의 바깥 면에 길쭉하고 뾰족한 철못들을 촘촘하게 박아놓았다. 아마 침입자들이 코끼리의 힘을 이용하여 이 문을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설치해 놓은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문의 기둥 벽면 우측에 다섯 개의 손자국, 왼쪽 벽면에는 수십 개의 손자국이 새겨져 금색을 입혀놓았다. 이것은 1843년 Maharaja Man Singh이 죽어서 화장을 할 때 그의 미망인들이 마하라자의 화장용 장작더미에 몸을 던져 집단 자살('써띠'라고 함)을 행하면서 남긴 흔적으로서 인도 힌두교인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라고 한다. 힌두교 신상에 아름다운 꽃을 실에 꿰어서 걸어놓은 것처럼 이 금색 손바닥 자국에도 꽃을 걸어놓았고, 인도인들은 그 앞에 멈춰 서서 합장을 하고 무수히 허리를 굽혀 경배의 뜻을 표하였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각 개인이 지닌 가치관이다. 그 가치는 그 사회 구성원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써띠는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참으로 무모한 죽임이다. 그러나 써띠는 1800년대 초반 인도 궁중사회의 도덕적 가치 아니 미적 가치로서 행해진 것 같다. 그리고 그 사회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를 방조 혹은 조장하고 찬양하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현재의 인도인들도 써띠를 아름다운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우리나라도 백마강 낙화암 삼천 궁녀의 이야기가 있다. 삼천궁녀들이 백마강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낙화(洛花)로 비유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나라 잃은 백성들이 약삭빠르게 변화된 현실에 안주해 버리는 것을 경계하고 신의와 지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삼천 궁녀이야기를 미화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써띠도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박물관에 들어서자 왕이 코끼리를 타고 갈 때 사용하는 가마들을 진열해 놓은 곳이 보였다. 가마의 모양도 여러 가지였고 장식들도 가지가지였고 아름다웠다. 왕의 검과 총포류들을 전시해 놓은 곳, 왕의 거처, 각종 거실과 침실들,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던 곳, 왕실에서 사용하던 장식물들이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들었다. 왕을 비롯한 궁정 사람들의 일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들은 궁정생활이 얼마나 호화로웠던가를 잘 보여주었다.
박물관을 나와서 포대가 있는 능선으로 올라가 보았다. 아득하게 쌓아올린 축대 아래는 현기증이 나서 내려다보기가 겁이 났다. 지형이 높은 곳인데 까마득하게 축대를 쌓아 올린 요새로서의 성이 참으로 견고하고 장엄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위 요소요소에 대포를 배치하여 적의 침략을 막았던 것 같다. 이것이 중심 성이며 저 외곽으로 외성을 일차적으로 조성해 놓고 중심이 되는 이성의 바로 아래쪽에도 성을 만들어놓았는데, 그것들은 시가지 가옥들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평원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산, 그리고 그 위에 성곽을 쌓고 그 한가운데 지어놓은 궁궐은 더욱 장엄하게 보였다. 이 성을 축성(築城)하느라고 일반 백성들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장비도 시원찮았을 텐데 이렇게 높은 성을 쌓느라고 커다란 돌을 들어올려 놓기 위하여 동원된 인력이 얼마나 많았을까. 결과적으로 백성의 고혈로 만들어진 성이다. 일반 백성들을 위한 성이 아니고 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위해서 이 성이 축성되었을 것이다. 백성을 위해서라는 말을 앞세워 자기들의 영화만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예뿐 아니라 지금도 엄연히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성의 축대 위에서 조드뿌르 시내를 내려다보니 도시를 푸른색으로 물들여 놓았다.
성 안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서는데 서양여인이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얼른 인사에 답례를 하고는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멀뚱해 있노라니 그녀는 우리와 같은 여관에 묵고 있다고 하였다. 서양 사람들은 표정이 밝아서 그들의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무척 좋다. 나도 항상 밝은 표정을 남에게 보여주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실천이 되지 않는다.
성곽에서 내려오니 벌써 3시 반이었다. 우리는 바로 여관으로 돌아갔다. 나들이 나간 투숙객 중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돌아온 것 같다.
아침 일찍 유적지를 돌아보면 젊은이들은 없고 동양인이나 서양인들도 마찬가지로 나이 많은 사람들만 득실거린다. 아마 젊은이들은 여행을 하면서 즐기고 다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늦잠을 자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꼴까따 파라곤여관에서 묵었을 때 젊은이들은 저녁 늦도록 기타치고 북 두드리고 하면서 여러 나라 젊은이들이 우정을 나누고 젊음을 발산하는 것을 처음은 귀찮고 짜증스럽게 느꼈는데 조금 겪고 나니까 그들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오늘 아침에 Meherangarh를 향하여 나설 때 아내는 느긋하게 나가자고 하여 10시가 다 되어서야 여관을 나섰는데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에서는 우리가 가장 빨리 나가는 것 같았다. 이 여관에 들어있는 젊은이들도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것은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성으로 올라갈 때 있었던 일이다.
어떤 사람이 Korean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였더니 무척 반기면서 자기 집에 들어가서 쉬었다가 가라고 아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그 청이 하도 정겹고 살가웠다. 지나친 친절에 경계심도 있었지만 아내가 좀 쉬어가자고 하여 그를 따라 들어가서 그들 내외가 제공하는 의자에 앉았었다. 한국의 계절과 도시이름들을 말하면서 한국을 잘 사는 나라라고 추켜세웠다. 한국에 가본 일은 없고 한국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네 집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보여주었다. 현재 자기들이 살고 있는 이집은 석조건물인데 조상대대로 살아온 집이라고 하였다. 비교적 집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정원도 아담하게 꾸렸다.
어느 방에서 책을 보고 있는 젊은이를 소개하였다. 그 젊은이는 그의 아들로 대학을 다니는데 공부도 남들보다 잘한다고 자랑하였다. 대학을 다니는데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더니 우리나라의 돈 천 원짜리 지폐를 보이면서 천원이 루피로 환산하면 얼마냐고 물었다. 우리는 인도인이 한국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다. 43루피 내외의 값을 지닌다고 하였더니 석장을 꺼내 보이면서 나에게 삼천 원을 루피로 바꿔달라고 하였다. 내가 가진 루피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두 바꿔주지는 못하고 2천원에 90루피를 주었다. 다 바꿔주지 못해서 미안하였다. 그들은 무척 고마워하면서 음료수를 만들어 줄 테니 마시고 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음료수를 주겠다는 말에 또 다른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사양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 부부는 무척 섭섭해 하면서 음료수를 만들어 놓을 테니 메헤랑가르를 구경하고 내려올 때 꼭 들려서 마시고 가라고 당부하였다.
의심할 만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은데 길에서 만난 인도인이 주는 음식이나 음료수는 절대로 먹거나 받아 마시지 말라는 말(뭄바이에서 처음 만났던 첸나이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학생 말, 사르나트에서 만난 여인의 당부)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둔 터라 어쩔 수 없이 사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