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봉천산
강화 봉천산
2016.09.16(금) 맑고 대체로구름이 많은 날이었다.
오늘은 하실회에서 강화 봉천산을 다녀왔다. 13여년 전에 강서중학교 제자들과 한 번 등정하였었는데,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느나 가파른 곳은 밧줄을 이용하여 올라가야 하는 등 산을 오르는데 불편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이번에 오니 그 때보다 길을 더 잘 정비해 놓았고 계단도 설치해 놓아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다.
봉천산은 46~7년 전에도 서너 번 오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길도 나 있지 않았고 봉천대가 허물진 상태를 그냥 방치해 놓았었고, 지각 없는 사람들이 와서 함부로 훼손해 놓고 가기도 했었다. 지금은 복구해서 잘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
봉천대
봉천산 정산에 돌로 쌓아 올린 방형의 제단이다. 강도지(江都誌)에 의하면 고려 때 축리소로 사용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대(臺)의 크기 높이 5.5m 밑지름7.2m의 정방형 새다리꼴 모양이다.
<Bongchondae is an after located at the top of Mt.Bonchon(291m above the sea level). According to Gangdoji. It was used as Chukri-so is Goryeo Dynasty. Therefore it is assured that this place was used for religious service in order to celebrate the sacrificial riles to heaven. It is the shape like a quadrate trapezoid and is 5.5meters height and 7.2meters in it's bottom diameter at it's base. >(출처 : 입간판 안내문)
봉천대 뒤 정자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날씨가 흐리고 옅은 안개가 시야를 터주지 않았다.
송해 벌판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고 있다. 저 멀리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에 있는 유도(留島)가 보인다.
서쪽으로 별립산이 우뚝 서 있다.
우측 중간에 고인돌이 있고 , 그 너머로는 송해 벌판이, 좌측 산 아래는 양오리가 있다.
멀리 고려산 정상이 보인다.
저 산 너머에는 북성리가 있고 북성리의 바다 너머에는 북한 지역이다.
양사 철산리의 바다 건너 이북이 희미흐게 보인다.
하점 벌
우리는 황금들판을 가로길러 걸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봉천산에서 하산하여 하점면 사무소 앞 큰 길을 건너 창후리 쪽으 곧게 가로 질러놓인 길을 찾아 들어서 황금들판을 걸었다. 포장된 농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40여 년 전에도 농로는 있었지만 비가 오면 진탕길이 되어 걸어다니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신삼리나 부근리에서 하점벌을 가로지른 길도 비가 오는 날에는 진탕길이 되었다. 지금은 널찍하고 반듯하게 길이 트여 편리하게 농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곳에서 생활했던 1960년대 말과 1970대 초에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다음 해에 모심기를 위하여 갯골로 흐르는 물을 막아 하점벌에 큰 호수처럼 물을 가두어두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그 물이 결빙이 되어 스케이트장으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별립산에서 내리 쏘는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하점벌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놀던 일과 하점벌을 지나 신삼리를 오갔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옛날에는 이렇게 큰 도로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신삼리 방향
신봉리 방향
벌판가운데서 바라본 별립산
신삼리 와 망월리 방향
이강리 모현 마을에 있는 고인돌
강서중학교
우리는 들판길에서 큰 길로 나와서 모현마을로 들어섰다. 그리고 바로 강서중학교 교정으로 들어가서 학교를 돌아보았다.
45년 전 5년간 이학교에 근무했었다. 그 때의 학교 건물은 다 헐어내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산듯한 모습의 학교로 변했다. 이 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아 왔을 때는 이 학교에 전기도 전화도 없었었다. 1970년에 전기와 전화가 들어왔었다.
중학교 평준화 이전 1969학년도까지는 초등학교 졸업생들은 전국 어디에서나 중학교를 자유로이 지원하여 입학시험을 치뤘다. 지원한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0년부터 전국적으로 중학교가 평준화되었다. 도시에서는 졸업한 초등학교 소재지에 있는 중학교를 하나의 학군으로 묶어서 추첨하여 학생들을 배정하였다. 그런데 농어촌 지역에서는 가장 가까운 인근에 있는 중학교로 배정하였다. 그래서 하점 내가 양사의 3개 면의 초등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강서중학교에만 입학하게 되었다. 이후 학생수도 상당히 늘어났다. 내가 이 학교를 떠날 무렵에는 14개학급으로 성장했었다. 지금은 전교생이 30명도 안 된다니 격세지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