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

고 유계 송지향(故 幽溪 宋志香) 선생님 유고집 "유계일기" 출판기념회

어르신네 2017. 5. 24. 22:36


故 幽溪 宋志香 선생님 유고집 "유계일기" 출판기념회


고 송지향선생님의 유고집 "유계일기(幽溪日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였다. 선생님의 유고집 발간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에 선생님의 차남이며 중학교 후배인 송동호씨로부터 전해 들었는데, 유고집이 이렇게 햇별을 보게 되기까지는 영주시문화관련기관의 후원에 힘입었다. 이는 선생님께서 이 지역사회의 정신문화를 찾아 일생을 헌신해 오신 그 은혜의 아주 작은 답례일 뿐이다. 한편 이 유고집은 자료를 찾아 정리한 송동호씨의 끈질긴 노력과 숱한 난간을 이겨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나의 중학교 3년 동안 국어를 담당하셨던 은사님이시다. 재학시절에 선생님의 모습은 늘 한복을 입으셨으며 긴 수염을 하고 다니셨다. 그 모습이 단아하고 정갈하셨다. 나는 1960년대 후반에 모교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근무했던 적도 있었다. 그 때 "영주향토지(榮州鄕土誌)"를 저작하셨을 때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선생님께서는 60년대 초반부터 향토문화를 탐색발굴하기 시작하시면서 일관되게 연구하여 영주시 뿐아니라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향토사의 탑을 우뚝 세워놓으셨다. 향토의 문화 유산을 찾아 관련 문헌을 섭렵하고 연구하여 정리하시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이렇게 연구정리한 것을 기초로 하여, 자료의 소재지를 탐문하였고, 개인이나 가문이나 어느 기관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은 현장에 직접 찾아가서 확인하고, 또 그 자료와 관련된 다른 자료를 찾아내기도 하셨다. 그 뿐아니라 영주시의 각 마을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 다니셨다. 또 일요일이나 방학 때에는 그 자료를 소장한 사람과 자료와 관련된 인물들을 직접 만나 탐문하기도 하셨고, 그 자료와 관련된 사실들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낱낱이 탐색하셨다. 어떤 기관이나 단체는 물론 특정한 개인의 후원도 전혀 받지 않고, 오로지 선생님 혼자의 힘으로 "영주향토지(榮州鄕土誌)"를 완성하셨다 

영주군은 산간벽지가 많은 곳이라 향토자료들이 대부분 오지(奧地)에 위치해 있거나 놓여 있었다. 그 때(1960년대)는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수소문하여 알아낸 자료를 찾거나 검색하고 확인하기 위하여 수십리 시골길, 산길을 걸어다니셨다. 어떤 때는 새로운 자료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퇴근후 늦은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료를 직접 찾아가서 확인하시고 야심한 밤길을 돌아오시곤 하셨다. 그렇게 고생하시면서 발간된 "영주향토지"였다. 

"영주향토지"와 관련하여 그렇게 심혈을 기울이시고 갖은 고생을 다하시고 "영주향토지"가 간행되었었다. 그러나 선생님께는 저작자에게 마땅히 지급되어야 할 인세는 커넝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하셨다. 저자에게 돌아온 것은 몇권의 책 뿐이었다. 그 책들도 대부분 지인이나 자료 제공에 도움을 준 분들에게 무상으로 주셨다.  당시 선생님은 박봉으로 생활하시면서도 자료를 찾는 일을 위해서 수월찮은 지출을 감내하셨다. 당시 나는 선생님을 옆에서 모시고 있었으면서도 "영주향토지"에 대한 선생님의 작업을 물건너 불구경처럼 했었다.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1969년에 나는 금계중학교에서 경기도 모공립학교로 전출하였다. 나는 생활터전을 모두 경인지역으로 옮기는 바람에 고향을 찾는 발길이 뜸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향과 함께 늘 우리들의 마음 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영주향토지"를 완성하신 후에 1969년에 교직을 떠나셨다. 수년동안 해가 바뀔 때에 연하카드를 올리는 것으로 인사치례를 했을 뿐 선생님을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하였다. 경북 북부지역의 향토사 연구와 집필에 온 정성을 다쏟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책을 보시거나 글을 쓰실 때에는 조금도 흣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자리를 지키면서 열중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내 마음이 느슨해지고 몸가짐이 흩어질 때마다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떠 올리며 자신을 돌아보곤 했다. 그렇게 선생님은 나를 다잡아 주셨다. 

서울지역에서 직장을 가지고 있는 동창들을 만나면 자연 고향 얘기가 나오고 그 첫번째 화제는 늘 우리 송지향선생님이었다. 선생님께서 교직을 떠나신 후에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향토사 연구에 온 심혈을 기울이신다는 소식도 듣었다. 어쩌다가 고향을 찾으면 선생님을 꼭 찾아뵙곤 했다. 그런데 내가 정년을 하고 그 이듬해에 선생님께서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사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심했던가하고 자책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나는 송 후배로부터 지난 해 가을에 선생님을 회고하는 글을 한편 부탁을 받았었다. 나는 차일피일 미루다가 또 까맣게 잊고 말았다.

선생님께서 40여년 전 내가 근무지를 옮기게 된 경과와 나의 근황에 대한 편지글을 선생님께  올렸더니, 격려와 교사로서의 도리와 책무 그리고 교사라는 특수 직분을 가진 자의 생활 자세에 대한 주옥같은 말씀을 담아 보내 주셨다. 그것을 복사하여 송 후배에게 전해주고 부탁한 원고는 까맣게 잊어먹었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한심하다. 나는 선생님의 그 옥고를 보물로 간직하고 가끔 찾아서 읽어보곤하였다. 그 편지는 나의 교과서였고 내가 교직생활을 해나가는 나침반이었다.   송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절제와 단정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것 같다. 선생님의 정갈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유계일기 출판 기념식장에서


좌로부터 금계중4회 권기호 전정길 5회 김광수 진영일


유계일기 출판 기념식장에서 ㅡ 금계중 동문들



출판기념회식이 끝나고 워크숖이 있다고 하였으나 귀경하는 기차시간관계로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런데 기념식이 끝나고 이종옥 선생님을 만났다. 금계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여러 면에 많은 신세를 졌던 이종옥 선생님을 거의 49년 만에 만났다.  만나서 변변히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너무 미안하였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인품처럼 곱상한 자태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오늘 기념식에는 금계중학교 졸업생들이 다수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