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근대 역사 현장 -- 제물포구락부 외
인천의 근대 역사 현장
제물포 구락부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 6월 당시 제물포에 거주하던 미국, 영국,독일, 러시아 등 외국인들의 사교장이었다.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며 사교실, 도서길, 당구장 등이 있었으며, 실외에는 테니스코트도 있었다고 한다. 조계 시절에는 외국 인사들의 사교장, 일제강점기에는 일본향군인회와 부인회가 사용했고, 광복후에는 미군장교클럽, 6.25 전쟁당시북한군의 본부, 9.18 수복 후에는 시의회, 교육청, 박물관으로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신을 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
인천시장관사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인천광역시시역사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홍예문
홍예문(虹霓門 )
문화재 지정 :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
건립시기 : 1908년
성격 : 건축, 근대시설, 터널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일본은 인천항과주변 조계지의 확장을 추진하였다. 이 때 지금의 동인천역인경인선 축현역(杻峴驛) 방향으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해서설치하였다.
역사적 변천 :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인천의 조계지를 중심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였는데, 1905년의 을사늑약을 계기로 삼아 본격적으로 영역을 늘렸다. 하지만 조계지에서 만석동으로 가려면 지형적인 한계로 인해 서북쪽의 해안선을 거쳐 가야 하였다. 이러한 불편을 없애기 위해서 공병대를 동원하여 홍예문을 뚫기 시작하여 1908년에 완성하였다.
내용 :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급격히 늘어나자, 일제는한정된 조계지를 벗어나 인천 전체 지역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하였다. 특히 인천의 중심이었던 만석동과 연결할 필요가 있었는데, 송현동 언덕이 매우 높아 오고가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아치형 터널인 홍예문을 뚫고 2차선의 도로를 개설하여 차량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무지개처럼 윗부분이 둥근 홍예문은 전체 높이 13m, 폭 7m로, 일정한 크기로 다듬은 네모난 화강석을 쌓아 만들었다. 다만옆면은 마름모 모양으로 다듬은 화강석을 축대돌쌓기로 쌓아 다른 면과 차이를 두었으며, 윗부분의 안쪽은 붉은 벽돌로 마무리하였다. 공사를 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암벽을 만나 공사 기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당시 일본인들은 이 문을 ‘혈문(穴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천 자유공원에서 이 문을 지나면 인천항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 이 문은 화강석과 붉은 벽돌을 이용하여 아치형의 교통 시설을 쌓았던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면서, 일제의 세력 확장 흔적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불호텔
대불(大佛)호텔은 1888년(고종25년)에 일본인 호리(堀力太郞)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다.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이라 항구를 통해 인천에 도착한 외국인들은 대개 하루 이상 인천에 머물렀기 때문에 인천에 대불호텔이 제일 먼저 생긴 것이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이 되면서 극심한 불황을 겪게 되자 중국인에게 매도되어 중화루라는 요리집으로 용도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78년에 건물이 헐렸다. 인천광역시에서 이 역사적 건물의 복원 작업을 현재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