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의 젊은이가 중동과 동유럽을 해매다<34>-마드린에 가다-
<마드린(Mardin)에 가다>
2005년 11월 8일 (화) 맑음 오늘은 Mardin을 갔다가 왔다.
원래 마르딘에서 1박을 하고 산르우르파로 가려고 계획했었는데 배낭을 짊어지고 옮겨 다닌다는 게 번거롭고 쉬운 일이 아니다. 마드린은 당일로 디야르바크르에서 다녀올 수 있는 코스라고 하여 그렇게 했는데 잘 한 것 같다.
아침 8시에 여관을 나섰다.
바자르 입구에서 시내 돌무쉬를 타고 외곽지대의 마드린 행 미니버스가 있는 오토갈로 갔다. 마드린 행 미니버스가 8시 30분에 발차하여 시리아와 접경지대인 마드린을 향하여 대평원의 넓은 농장지대를 거침없이 내달았다. 아직도 수확되지 않은 면화(棉花) 밭들이 많이 보였다. 가끔 인부들이 면화를 거둬들이는 모습도 보였다.
8시55분에 Cinar라는 곳을 지나는데 트럭 한대가 완전히 드러누워 버린 대형사고가 보였다. 구호의 손길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지금 타고 가는 이 차도 안전하게 운전하고 있는지......
Cinar를 지나면서도 대평원은 계속되다가 9시 조금 지나면서 나지막한 산들이 보였다. 산에는 비실대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보이기도 하고 어떤 곳은 제법 숲을 이룬 곳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산들은 민둥산이었다.
10시 지나서 마드린에 도착하였다. 마드린은 산꼭대기에 있는 도시라서 평지에서 시내 중심부에 들어서려면 갈지자로 된 산 비탈길을 힘들게 기어 올라가야 한다. 도시가 산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형상이다. 마드린 시내 중심부에서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남쪽 대평원의 저쪽은 시리아와 국경을 이루는 곳이라 한다.
이곳에는 쿠드르인이 중심이 되고 아랍인들과 어울려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왜 이렇게 산꼭대기에 모여서 사는 걸까? 평원의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성을 쌓고 살면 외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이 침입한다 하더라고 유리한 고지에서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 같다.
시내로부터 낭떠러지처럼 급강하한 저 아래 바닥에서부터 시작되는 평원에서 농사지어 여기까지 가지고 올라오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쩐지 마드린 뒷골목에는 곡식이나 물건 혹은 사람들의 운반 수단으로 사용되는 당나귀와 말들이 많이 보였다. 아마 저 아래 평원에서 거둬들인 농산물의 운반 수단으로 이런 짐승들이 이용되었을 것 같다.
사람이 당나귀나 말을 타고 다니는 모습이나, 짐을 싣고 계단 길을 오르내리는 당나귀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랫집과 윗집을 이어주는 길은 모두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나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아주 불편한 길이다. 그래서 이런 짐승들이 지금도 많이 이용되는 모양이다.
마드린에 내려서 처음 찾아간 곳은 시리아 정교회이었다. 서기569년에 건축되었으며 순교자 40인의 뼈가 묻힌 곳이라 하여 ‘40인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버스 정거장에서 시장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에 있다. 문이 잠겨 있어서 벨을 누르니 한참 있다가 중년의 남자가 문을 열어주고 안내해주었다. 'Father!'냐고 물으니까 아니라고 하였다. 조그만 교회인데 깨끗하게 잘 정리해 놓았다. 안내하는 분이 교회의 문을 열고 조명등을 켜주었다. 현란한 조명등 아래에 나타난 교회 내부는 깨끗하였고, 벽과 기둥에 아름다운 각종 성화를 걸어놓아 교회의 분위기가 아늑하면서도 경건하였다. 아내원이 교회의 구석구석을 안내하면서 설명을 해 주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아마 교회가 겪은 고난사(苦難史)를 말하는 것 같았다.
교회를 나와 시장에 가보았다. 골목길 시장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그 좁은 시장길을 당나귀를 타고 가는 사람, 커다란 짐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과 많은 보행자들이 시장길을 꽉 매웠다.
시장 바로 아래쪽에 있는 울루 자미(Ulu Camii)에 들어가 보았다. 셀추크 왕조 분열이후 이 땅을 지배하였던 아르투크 왕조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한다. 자미 안에는 역시 거대한 원주와 기둥들이 안을 꽉 매운 것처럼 늘어서 있고, 원주 사이사이에 신자들이 성직자가 집행하는 예식 절차에 따라 여러 줄로 늘어서 한쪽 방향으로 서 있기도 하고 혹은 무릎을 꿇고 절도 하면서 이슬람 종교 의식을 치루고 있었다. 울루 자미에서 사람들이 가지는 이슬람 예절 의식을 지켜보다가 나왔다. 미나레에 서력의 1176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다고 하여 찾아보았으나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시미에 신학교를 찾아가려고 울루 자미에서 나왔다. 계단을 조금 내려오니까 공동 빨래터 같은 곳에서 서너 명의 아낙네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빨래를 하면서 여인들이 정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니, 지난날 우리네 시골냇가에서 여인들의 빨래하던 모습이 연상되었다. 이 높은 지대에 천연수가 흐른다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골목을 잘못 들어 계단 길을 오르고 내리느라고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카시미에 신학교 찾은 일을 포기하였다. 골목길에는 말과 당나귀 똥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어 그것을 피해 다니기도 성가셨다. 그런데 더 성가신 것은 동네 꼬마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나를 보자마자 ‘머니(money)’, ‘머니’하면서 따라다녔다. 또 어떤 녀석은 “What's your name?"하고 묻는다. ‘고얀 녀석들! 할아버지 이름을 묻다니! 괴씸한지고!” 그러나 여기는 중동, 우리와 사고의 틀과 정서가 다른 곳임을 어쩌라!
이곳의 대부분 집들은 두터운 벽돌담에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어서 안을 엿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어느 가정집의 대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한 거구의 남자가 마당에서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집안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처음엔 무슨 말이지 못 알아듣더니, 한참 있다가 들어오라고 하였다.
이집 부부의 자녀는 남매인데 지금은 모두 집을 떠나 있다고 하였다. 집의 규모가 아주 작았다. 좁은 마당은 넓적한 돌들을 깔았고 가장자리에 작은 꽃밭과 화분이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 포도나무를 심어서 넝쿨을 올려 마당을 그늘지게 하였다.
비가 오면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한 곳으로 흐르게 하여 지하 저수지에 저장하였다가 쓴다고 하였다. 이곳이 산꼭대기에 가까운 지대라서 물이 귀하니까 빗물을 모아서 저장해 두었다가 사용한다. 물을 저장해 둔 곳의 깊이와 넓이를 물었더니 조상들이 만든 것이라서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리는 빗물은 생활용수로 쓸 수 있을 만큼 이 지역이 청정지역인 것 같다. 실재로 마드린에서 디야르바크르로 돌아올 때 얼마나 대기가 맑은지 아주 먼 곳까지 시야가 미치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40km나 남은 지점에서 바라보이는 디야바크르가 지척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보였고, 디야르바크르 저쪽 멀리 평원지역을 막아선 산들까지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시야가 맑았다. 그러니 이곳에서 내리는 빗물은 식수로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깨끗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마드린이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이긴 한데, 이 지역사람들도 각종 현대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여 공해물질들을 배출하고 있기 때문에 토양과 수질의 오염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집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출입구 쪽은 거실 겸 다용도실 같았고 좌측이 거실 겸 침실이었다. 동쪽 거실 입구에 들어서면 방바닥에는 두꺼운 카펫을 깔았고, 천정은 아치형이며, 방의 남쪽 창문은 채광역할을 하였다. 북쪽과 서쪽 벽 중간중간에 아치형으로 공간을 만들고 거기에 작은 가제도구들을 올려놓았다. 방바닥 가장자리에 침대를 한쪽으로 몰아놓고, 방 중간에는 소파와 탁자를 놓았다.
출입구 우측으로는 주방인데 주방 안쪽의 부속실에는 잡다한 주방 기구들을 정리해 놓았다. 주인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보여주려고 하였다. 옥상에 올라가 살펴보았는데 방안에서 본 천정은 돌로 쌓은 아치형인데 윗면은 평면이고, 지붕이 태양열이 방안으로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무척 두껍다. 그리고 지붕의 사방 가장자리는 담을 높게 쳐올려놓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내어주는 차이와 과자를 얻어먹고 보디랭귀지로 담소하면서 쉬다가 나왔다.
디야르바크르에 돌아오니 3시가 조금 지났다. 1시간 10분 만에 고속도로도 아닌 일반도로100여km를 달려온 것이다.
시장골목 뒤에 있는 문화박물관을 갔다. 1733년에 지은 집에 당시의 이 지역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물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그리고 전시장 저 안쪽 방에는 이 집의 주인이었던 시인 자히트 타란즈에 관한 사진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너무 간단하고 규모가 작아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Melk Camii에 갔다. Safa Camii를 찾아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들어간 곳이 Melk Camii였다. 자미 안에 들어가니 내부 석조물들이 중후하여 나를 압도하였다. 아무도 없는 자미 안에서 이구석 저구석 알뜰이 살펴보았으나 다른 자미들과 특이하게 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나왔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자르를 지나왔다. 바자르에서 식료품상을 지나가는데 고추장 같은 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우리나라 고추장하고 맛이 비슷했다. 그리고 그 앞에 고춧가루도 있었다. 어쩌면 터키인들과 우리나라 사람은 먼 조상을 같이 했을 것 같다. 언어학상으로는 터키어와 한국어가 한 조상언어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생활습관도 공유했던 부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돈을 많이 썼다. 가능한 필요없는 지출은 하지 않아야겠다. 산르우르파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마르딘에 있는 시리아 정교회
마르딘 거리모습
마르딘 시장 모습
마르딘 시장
울루 자미
울루자미
마르딘시장에서 시리아쪽으로 바라다보이는 산아래의 평원
산꼭대기 가까운 곳에 있는 우물
산꼭대기에 매달린 것 같은 마드린
마르딘의 어느 골목길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 : "What's your name?"하더니 원달라를 요구하던 녀석들----
마드린 거리
울루 자미 내부
울루자미 내부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
마드린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