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냐꾸마리
2006년 2월 27일(월) 맑음
요즈음 며칠째 깊은 잠을 자지 못하였다. 남쪽 지방이라 밤에도 후덥지근하여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머리가 무겁다. 밤새도록 선풍기를 돌려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4층에 묵었던 한국인 모녀는 아침 일찍 아웃했다고 했다. 9시 조금 지나서 check out하고 버스 정거장으로 갔다. 마침 Trivandrum 가는 버스가 있었다(36루피). 꼴람 시내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볼거리가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아서 참고 깐야꾸마리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11시 조금 지나서 Trivandrum에 도착하였다. 트리밴드럼에서는 구경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거기서 하루 더 묵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지나쳐가기로 했다.
12시에 깐냐꾸마리 행 버스를 탔다.
지난밤 엎치락뒤치락 깊은 잠을 못잔 덕분에 트리밴드럼에서 깐냐꾸마리에 도착할 때까지 졸면서 왔다. 지열(地熱)이 차창 밖으로부터 밀려들어와 버스 안이 후덥지근하였다. 버스의 배기통이 터졌는지 대포소리를 내면서 달렸다.
커다란 배낭 때문에 맨 뒷좌석에 앉았더니 배기통에서 나는 소리가 시끄러운데다가 승객들이 뒷문으로만 타고내리면서 내가 앉아있는 뒤쪽으로만 몰렸다. 버스 안이 소란스럽고 복잡하여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차는 무척 빨리 달리는 것 같았다. 도로의 폭이 좁고 노면 상태도 좋지 않고 굽은 길이 많았다. 뒤에 앉았더니 몸이 튀어오르기도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도 하였다.
깐냐꾸마리가 얼마 안 남은 지역에서 어떤 남루하게 입은 불구의 늙은이가 탔다. 그 노인이 차장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니까 내 옆자리를 가리키면서 가 앉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금 가다가 한 젊은 여인이 탔다. 그녀가 차장 옆자리에 앉았다. 그냥 앉게 하였다. 차장의 심리를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후 2시30분경 버스는 깐냐꾸마리에 도착하였다. 내 옆에 앉았던 노인이 차장을 제껴놓고 버스에 탄 외국 여행객들 모두에게 손짓을 하면서 내리가고 하였다. 버스 종점까지 가지 않고 그 전 정거장에서 모두 내렸다.
여관을 물색하는데 한 녀석이 다가오더니 200루피의 좋은 여관을 소개(소개비 5루피)하여 따라갔다. Hotel Ramshath- 호텔이 바다 가까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 요금으로 더 좋은 데를 갈 수 있다고 생각도 되었지만.......
하나의 대륙에 버금가는 큰 땅덩어리인 인도의 최남단, 동쪽에는 벵골 만, 남쪽에는 인도양, 서족에는 아라비아 해 등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였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우리나라의 ‘땅끝[土末]’에 해당하는 곳에 지금 내가 와 있다.
깐냐꾸마리는 힌두교의 성지(聖地)로 이곳에서는 빠르워띠(Parvati)의 화신인 데위 껀냐(Devi Kanya)의 여신을 섬긴다고 한다. 이 성지를 순례하는 힌두교도들은 사원을 방문하고 성스러운 바닷물에 목욕을 한다. 해변은 평범하지만 깐냐꾸마리의 해변을 순례하는 것이 그들의 영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남녀의 순례객들이 바다 물에 몸을 담그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바닷가에는 조그만 포구가 있고, 그 앞 바위섬에 동상을 세워놓은 바위섬과 사원건물을 세운 바위섬이 있다. 포구에는 작은 배들이 무수히 정박해 있고 포구 저 밖에서도 거친 파도 속을 헤집고 다니는 배들이 많이 보였다.
사원과 동상이 서있는 바위섬에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갔다가 나왔다.
막 배에서 내린 순례객들이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울긋불긋한 차림의 여인들이 골목을 휘몰고 지나갔다. 또 한 패거리의 늙은 부부들이 골목을 메우고 느릿느릿 움직였다. 성지를 찾은 힌두교도들은 충만한 기쁨과 경건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영적인 세계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순례객들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점포들과 음식점들이 많았다. 잇속을 챙기기려 하는 장사꾼들이 얄팍한 인심과 무례함이, 경건하고 고양된 신앙심으로 성지를 참례하고 있는 순례객들의 마음에 비집고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해변 공원에 비(碑)가 보였다.
그것은 2004년 12월 이곳에서 쓰나미로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追慕碑)였다.
인도에서는 암만을 제외하고 이 깐냐꾸마리가 쓰나미의 피해가 가장 샘했고 인적손실도 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추모비에서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아름다운 깐냐꾸마리에 다시는 그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2006년 2월 28일(화) 맑음
지난밤도 잠을 설쳤다. 더위와 모기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날밤을 샌 것 같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맑지 못하였다. 그래도 오늘의 몫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에 일찍 일어나서 체조를 하였다. 몸이 한결 풀린 것 같다.
오전에 꾸마리 암먼 템플(Kumari Amman Temple)로 다시 가보았다.
우리나라 해남 땅끝[土末]처럼 표지(標識)가 어디엔가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 순례객들은 오늘도 줄을 이었다. 바다 가운에 vivekananda Memorial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다. 배를 보니까 너무 불안정해보이고 관리인들이 승객들을 짐짝 다루듯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배를 타고 갈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서 꾸마리 암먼 템플로 발을 돌렸다. 어저께 본 것이지만 보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꼼꼼히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머리가 몽롱해지고 더 이상 돌아다니든 것이 어려울 것 같아서 그늘이 있는 간디 기념관을 찾아갔다. 1층에는 간디의 평소 활동했던 행적을 담은 사진 20여점을 전시해 놓았을 뿐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1층 중간에 특별한 장소가 있는데 아마 간디의 유해가 바다에 뿌려지기 전에 유해를 보관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층에 올라가니 멀리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다.
간디 기념관을 나와서 조금 떨어져 있는 위에깐넌더 뿌럼(Vivekananda Puram - 방랑하는 승려)에 갔다. 이 박물관은 힌두교 교리와 사회정의개념을 결합하여 발전시킨 스와미 위웨까넌더(Swami Vivekananda)가 인도 전역을 빠짐없이 순례한 그 여정과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 앞에는 무수한 힌두교도들이 출입을 하고 있어서 들어가서 보기가 어려워서 돌아 나와 여관으로 왔다. 오후 3시 때까지 부족한 잠을 채우려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였으나 허사였다 책을 뒤적이다가 그냥 눈만 감은 채 누워있었다.
3시경 밖에 나뭇잎이 살랑거리고 창 너머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였다. 그래서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깐냐꾸마리에 와서 바위섬에 있는 위웨깐넌더 기념관(Vivekananda memorial) 관람을을 하지 않고 갈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일었다. 그래서 배를 타려 부두로 나갔다. 일요일도 아닌데 부두로 나가는 골목의 가게들은 모두 철시하였다. 아마 너무 더워서 활동하기 힘든 시간인 한낮에는 장사도 안 되니까 철시를 하고 그늘에서 쉬거나 낮잠을 자는 것 같다.
그러나 위웨깐넌더 기념관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하여 부두에 대기하고 있는 관람객들은 끊임없이 줄을 이었다. 섬으로 드나드는 배가 두 척인데 들어가는 배나 나오는 배가 만선이 되어야 움직이기 때문에, 관관객이 많을 때는 섬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길 수밖에 없다. 줄을 서서 1시간을 훨씬 지나서야 배를 탈 수 있었다.
성지(聖地) 순례를 온 사람들은 빠짐없이 이 기념관에 참배하는 것 같다. 참배객들은 기념관을 꼼꼼히 살피면서 그 행동이 경건하고 진지해 보였다. 젊은이들도 많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떠들고 키득거리면서 좀 들뜬 기분으로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위섬이 하나의 돌덩어리로 이루어졌다. 이 큰 바위를 잘 손질하여 그 위에 아름다운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사원내의 그림과 글들을 알 수는 없고 다만 겉만 대충 훑어보았다. 기념관 동쪽에는 해시계(Sun Rise Calendar)가 있었다.
배는 승객들을 태우고 처음에는 기념관에 내려놓았다가 기념관을 돌아보고 나오는 사람들을 다시 싣고 동상이 있는 옆의 바위섬에 내려놓았다. 동상 건물 안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 3층에서 건물 밖으로 나왔다. 3층에서 동상 주위를 돌아 바다와 육지 등 사방을 볼 수 있다. 3층에 동상의 발이 있으니 동상은 3층 위에 세워진 것이다. 동상의 내역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였다.
동상을 둘러보고 나왔다. 배에서 내려 꾸마리 암면 템플로 갔다. 템플에 들어가는 남자들은 웃옷을 벗고 맨몸으로 들어가라고 하여 웃옷을 벗었다. 그런데 내 앞뒤의 모든 사람들은 까만 살갗인데 나만 유독 흰 살결이라 뭇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또 사원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 벗고 맡기는데 3루피 입장료 3루피 기름 비슷한 것 파는데 10루피 그리고 가는 곳마다 무엇을 하나씩 주면서 돈을 내라고 하였다. 성지가 아니라 돈을 뜯기 위한 장소 같았다. 나는 순례자들의 방문처로서 중요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알고 들어갔는데 어둡고 퀴퀴한 인도 특유의 향내를 풍기는 답답한 통로를 따라 돌고 돌아서 빠져 나왔다.
저녁 식사를 하려 식당을 찾아 가다가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한방에서 같이 잤던 일본 청을 또 만났다. 그는 미리 이곳에 와 있는 일본 친구를 찾아간다고 하였다. 여행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다. 사람도 자연도 만나면 헤어지는 것인가 보다.
2004년 12월 이 지역에 닥쳤던 쓰나미 대해서 알고 싶어 여관 사람에게 물었더니 이곳보다는 꾸마리를 비롯한 그 인근지역에서 800~900여명의 인면손실이 있었고 어업이 절단 났다고 하였다. 해일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좀더 알고 싶었으나 언어 잘 통하지 않아서 아쉬웠다. 해상 공원에 스나미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탑이 있는데 너무 초라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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