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강화 교동

어르신네 2014. 10. 21. 16:50

 

화 교동도(江華 喬桐島)

 

 

오늘 벼르고벼르던 교동도를 다녀왔다.

강화에 있는 모 중학교에 근무하던 1969년 11월 말 경에 교동도에 가본 이후 한 번도 교동도에 가보지 못하였다. 그 때 교동중학교에서 있었던 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갔었는데, 교동도에 내려 여관으로 갔을 때는 해가지고 어두워졌었다. 이튿날 교동중학교에서 행사를 마치고 배 시간에 맞춰 바로 돌아왔기 때문에 교동도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교동에 다시 가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강화에서 교동도에 가려면 인천에서 출발하여 외포리를 경유하여 교동으로 가는 배편을 이용해야 하였다. 창후리에서 교동으로 가는 배는 훨씬 후에 생겼다.

당시에 교동에 사는 사람들이 군청이 있는 강화읍에 가는 것이 인천에 가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교동 사람들이 강화 본도보다 인천이나 서울로 출입을 더 많이 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는 아침에 교동 가는 배가 인천에서 출발하여 교동을 향하여 오면서 여러 섬을 둘러서 오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인천에서 출발한 배가 외포리에 도착하는 것은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외포리에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교동 월선포 포구에 도착해야 하였다. 당시에 강화는 위수지역이라서 바다에서 해가 지면 모든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강화에서 인천으로 나오고나서도 여러 해가 지난 후 창후리에서 교동 가는 뱃길이 트여 강화에서 교동 가는 뱃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그런데 이젠 강화의 인화리와 교동도 간에 연육교가 생겼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이란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컫는 것이라라.

 

인천 부평에서 아침 7시 25분에 90번 버스를 타고 강화버스터미널에 9시 10분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강화 터미널에서 교동도 행 9시30분 버스로 갈아타고 송해면과 하점면을 지나 양사면 인화리로 달렸다. 그리고 버스는 인화리와 교동도 간에 연결된 연륙교를 건넜다. 그리고 교동대교를 건너온 버스는 봉소리와 고구리를 거쳐고 면소재지인 대룡리를 지나 옛날 인천에서 오던 배의 종착지였던 교동도 월선포까지 갔다. 우리는 버스 종점인 월선포에서 내려 강화 읍성과 연산군 잠저지(燕山君 潛邸趾) 그리고 향교 등를 들러보고 다시 산중턱의 화개사로 숨차게 올라갔다.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오느라고 숨이 턱에 찼다. 산중턱의 화개사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산길을 따라 화개산 정상을 향하였다.

월선포에서 바라본 강화와 교동도를 잇는 교량

월선포에서 바라본 강화 별립산

교동도 안내도

 

월선포

 

    

    

교동의 가을

 

교동 향교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지방의 각 군현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출처 : 교동면 홈페이지>

 

연산군 잠저지(燕山君潛邸址)

      

                                 연산군 잠저지의 우물                                             조선조의 교동도 수장(首長)들의 공적비(公積碑)들

1506년 연산군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적거지는 봉소리 신골과 고구리 연산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조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11월 죽은 터이다. 또한 인근에는 부근당이 있는데 이 곳에 연산군과 그 부인 신씨의 화상을 모신 것이라고도 한다. 그 아래에는 교동부사가 있던 동헌자리가 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위에 누각을 얹고 있었던 돌기둥 두 개가 남아있습니다. 이 동헌자리에 황해, 경기, 충청 통호사가 있었다고 한다. <출처 : 교동면홈페이지>

 

 

교동읍성(喬桐邑城)(인천광역시기념물 제23호)

읍성은 지방행정 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이다. 대개 읍성 안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관리들의 업무 공간이다. 지역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며 비상시에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전에 임한다. 교동읍성은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한 때인 1629년(인조 7)에 쌓았다. 성의 둘레는 약 779m, 높이 6m의 규모로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내고 문루(門樓)를 세웠다.
세 문 모두 옹성을 설치했었다.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이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본진이 주둔하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고쳐 쌓았고, 고종 대에도 성문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동문과 북문은 어느 때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에 폭풍우로 무너져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부분만 남아있다. 1975년에 해체 복원했는데 문루는 다시 세우지 않았다.
<입간판 全文>

 

       

홍예문 앞에 있는 석물(石物)                                                       화개사                               

  

화개산 중턱 고즈넉한 곳에 자리잡은 화개사 

고려때 창건한 목조건물로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교동면 상용리의 "갈공사"에서 묵고 있던 무학대사, 낙공선사, 지공선사가 이곳 화개사로 공부하러 다니던 곳이라 전합니다. 당시에는 조그만 암자였던 것으로 화재로 불상 및 서적이 모두 소실된 것을 후에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또한 고려시대 목은 이색 선생이 교동을 아주 좋아하여 화개사에 머무르며 수양하고 글을 지었다 하며 화개산을 전국 8대명산중 하나로 꼽았다고 합니다.<출처 : 교동면 홈페이지>

 

 화개산 오르는 길 : 산을 오르는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가파른 길이다.  

 

화개산 마루턱에도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소나무들이 있어서 산행자들의 눈길을 끌어 발을 멈추게 한다.

 

화개산 정상 부근에 조선조 때에 지역과 지역간의 위급사한 사항이나 중대사항이 발생하면 알려주던 일종의 통신 시절인 봉수대가 있다.  

화개산 산마루길 -  이 산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개산 정상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다

화개산 정상 표지 259.6m

바다과 갯별

바다 저쪽은 북한 지역인 황해도 연백이다.

깨끗한 날씨였더라면 이북이 좀저 선명하게 보였을 텐데... 

화개산 정상에 올라서면 황해도 연백 지역이 보인다. 교동과 연백간의 가장 가까운 곳은 2km정도밖에 되지 않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는 아주 가까운데 심리적으로는 가장 먼 곳이 북한지역이다. 오늘날 대한민 국민이면 세계 어디에도 다 갈 수 있다. 북한을 제외하고 우리 국민이 가지 못할 곳은 없는 것 같다.  남쪽사람들과 북쪽사람들이 같은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한 조상의 피를 나눈 한 민족인데, 남북이 각기 지역을 통치하는 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휴전선)을 견고하게 쌓아놓고 철천지 원수처럼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우리 한민족은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세계유일의 민족이다.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교동과 연백 사이의 바다를 육안으로 보고 있노라면 교동 사람들은 남쪽 갯펄에서 연백사람들은 북쪽 갯펄에서 평화롭고 여유롭게 물질하려 바다로 나오는 사람들이 곧장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저렇게 평화로운데 실은 거기에는 남쪽과 북쪽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무장을 한 군인들이 긴장의 끈을 움켜쥐고 있어서 일촉즉발의 위기감과 살기가 감돌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무심한 새들이나 들짐승들만이 저 바다 한가운데를  한가롭게, 자유롭게 유유자적한다. 저 바다의 물길로 고기잡이 배들이 드나드는 것을 볼 날이 어느 때에나 올까.....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에 떠 있는 섬들(서도면)

화개산 산마루에 올라서서 남서쪽을 바라보면 서도면에 속한 섬들이 바다가운데 점점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서해(西海)

화개산에서 바라본 서도(西島)와 서해(西海)

 

화개산 정상 정자에서 바라본 서해와 섬들

화개산 정상 정자 안에서 바라본 서해와 섬들

 

 

왼쪽은 강화 본도 오른쪽 앞부분은 석모도

 

교동 벌판

 

화개산 산성

교동도의 제일 높은 화개산 위에 지어진 내. 외성을 갖춘 산성(山城)이다. 종길이 2108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으로 남쪽은 산성상부의 절벽을 산벽으로 이용하고 북쪽은 화개산의 북록에 걸쳐 전체적으로 이용하여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다. 화개산성의 최초 축조 시기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으며 명종 10년(1555년) 이세운이 증축하고 선조 24년(1591년)에 이어 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영조 13년(1737)에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화개산 중턱의 약수

 

한증막(汗蒸幕)

조선 후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황토와 돌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선조들의 병환과 피로를 다스리는 민간 요법으로 이용되어온 시설로서 여렷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당시의 민간 목용시설로도 이용되던 이 한증막은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안에 불을 지퍼 온도가 높아지게 되면 재를 꺼내고 잎이 무성한 생순가지를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낸 후 옆 시냇물에서 냉수로 몸을 식혀 한증을 반복하는 방법으로 목욕은 물론 병을 치료하는 시설로서 1970년대까지 사용되었다.

교동에는 이 곳뿐만 아니라 수정산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 이와 같은 시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터만 남아 있다. 이는 현대 찜질방의 근원이라 할 수 있으며 옛 선조들의 치병(治病)과 목옥(沐浴)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시설이라 하겠다.

 

화개산 하산길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아을 앞의 느티나무

 

내려온 길을 뒤돌아 보며

허수아비

 

 

 

 

 

 

 

'인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천 자유공원  (0) 2016.11.24
인천의 근대 건물   (0) 2016.07.03
계양산 정상에서  (0) 2014.09.25
승봉도  (0) 2014.06.15
신도, 시도  (0) 201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