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동창모임

포방터를 찾다

어르신네 2019. 5. 19. 17:57

포방터를 찾다

고등학교 3한년 때 향촌동 집주인이 전세비를 올리겠다고 하여 우리는 전세비가 좀 낮은 곳을 찾아 헤맸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이곳 포방터였다. 채석장이 있어 아주 어수선하였다. 1960년 채석장에서는 폭약을 터뜨려 돌이 판자촌으로 날아들기 일쑤였다. 채석장과 주민들 간에 실랑이가 끊이질 않았다. 포방터에는 원래 민가가 없던 곳이었는데 이태원 판자촌에서 강제 철거당한 주민들이 임시 거처로 선택하여 판자촌을 형성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물론 세검정에서 내려오는 냇가를 따라 좌우에 몇 개의 주택이 산재해 있긴 했지만 집단 거주지는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 말경에 여름이 되면 현저동 교남동 향촌동 홍제동 등 서대문 쪽에서 여인들이 빨래감을 가져와서 세검정에서 홍제동과 홍은동 사이를 흘러내리는 개울의 곳곳에서 빨래를 하여 냇가 바위나 깨끗한 모래위에 널어 말리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때는 지금 포방터에 민가를 본 기억이 없다. 포방터 위 성벽과 자두밭을 보았던 기억만 난다.   

1960년까지만 해도 지금 포방터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다리가 없었고, 대신 징검다리로 건너 다녔다. 그 당시 문화촌과 약수동을 잇는 버스 노선이 있었다. 개울만 건너면 바로 문화촌 버스 종착역인데, 여름에 큰물이 나면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어서 홍은초등학교 쪽으로 내려가서 국도(國道)에 놓인 다리를 건너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어제(5/17) 자취하던 친구들이 모여 포방터를 찾았다. 60년 전의 흔적은 대부분 찾을 길이 없고 다만 몇 개의 골목이 우리가 다녔던 길이 아니었을까 추측될 뿐이었다. 개울을 따라 형성되었던 시장의 흔적은 반가웠다. 우리들은 세 들어 살던 집 부근에 갔으나 도무지 그 집의 흔적은 물론 그 집이 있던 자리조차 가늠이 안 되었다. 이 길 저 길을 오르내리며, 60여년의 세월을 반추하며, 봉지쌀을 사서 구공탄 아궁이에  밥해 먹던 우리들의 포방터 그 시절이 그리웠다















 아래 사진은 1960년 10월 포방터 일대









사진 우측 반듯하게  줄지어 선 주택은 당시의 문화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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