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2019.10.09 대이작도

어르신네 2019. 10. 30. 23:52

2019.10.09 대이작도




오랜만에 섬 나들이에 나섰다. 지난 5월에 덕적도를 다녀온 후 미국에 가 있다가 돌아와서 5개월만에 오늘 이작도를 찾게 되었다. 나는 내륙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지 못하다가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인천 앞바다를 보았었다. 그래서 늘 바다를 생각하면 찰랑이는 물결이 하늘이 닿는 지뼝선으로 펼쳐지는 확트인 세상을 느끼게 하였다. 그래서 늘 바다로 나간다면 괜히 가슴이 울령이고 들뜬 기분이 되었었다. 오늘도 그런 마음으로 이른 아침 연안부두를 향하여 집을 나섰었다. 오늘이 휴일인 한글날이라 대합실은 섬을 찾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뤘다.  








부아산 봉수대

봉수는 횃불(밤)과 연기(낮)을 이용해서 군대의 이동 상황이나 적의 침입에 대한 정보를 중앙(한양-조정)에 전해주는 군사용 신호체계이다. 대이작도 부아산(156m) 봉수대는 연변봉수(해안가 및 도서지역설치)이며 한반도 최고의 해양 요충지 중 한 곳으로 5거를 설치하여 평상시-1거, 행상에 적선 출현시-2거, 적선 해안에 접근시-3거, 적선과 접전시-4거 적 육지(섬)에 상륙시-5거로 남양부(현재 화성시)를 경유 최종 집결지는 한양(한성)의 목멱산(현재의 남산) 봉수대이다. 관리는 군사 10명과 오장 2명이 하고, 처벌은 적 출현 및 접근 미 거화시 장형70-100대, 적과 교전 미 거화시 참형에 처하였다.


이작도의 역사

고려말부터 군마를 사육하고 조선 태종 때 국영 목장으로 지정되어 59필의 국마를 54명의 목부들이 관리(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하였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에 속했으나 이후 고구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에 따라 소속이 바뀌고 고려, 조선시대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도)에서 송도(현재 개성시) 한양(한성 - 현재 서울)으로 운송하던 세곡선과 어선 무역선 등을 왜구 및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고려 때 수군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말 왜구들 이 섬을 점거하고 세곡선을 약탈하던 근거지로 한 때 이용되기도 하였음(고려사 변광수 전)


- 대이작도은 동경 126'37", 북위 37'37", 인천(연안부두 기준) 남서쪽 34mile(54km) 지점에 위치하고 면적은  

   2,57km, 해안선 길이는 18km, 최고봉은 188m의 송이산이며, 인구는 2013년 현재 140세대 283명이다.

- 현 위치에서 설치되었던 옛봉수대를 복원함.

- 왕도처라 일칼어지는 대이작도의 부아산 아기업은재는 한양(한성-서울)의 삼각산(북한산) 인수봉(아기없은

   형상)과 동일지명(북한산) 인수봉(아기 업은 형상)과 동일지명 부아악(負兒岳)이다.
























'인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10.10 자월도  (0) 2020.10.14
만월산에서 바라본 인천시내 모습(2020.07.24)  (0) 2020.08.02
2019.05.10 덕적도  (0) 2019.05.11
2019.02.03 연평도  (0) 2019.04.23
게양산 진달래  (0) 2019.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