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65세의 젊은이가 중동과 동유럽을 해매다<81> 암만의 제라쉬

어르신네 2006. 12. 25. 00:24

제라쉬(Jerash)

 

2006년 1월 11일 (수) 흐림 가끔 비

싱가포르 청년 레이몽(Raymond)이 아침 일찍 페트라고 떠났다. 그의 영국 친구와 한국 여학생과 일행이 되어서.......그는 가면서 또 만나자고 하였다.  

아침 일찍 우체국에 가서 손녀들에게 엽서를 부쳤다.


오늘은 제라쉬(Jerash)를 다녀왔다.

압달리 정류장에서 제라쉬 행 버스를 탔다. 제라쉬까지 가는 길이 평지가 아니고 언덕과 저지대를 오르고 내리는 굴곡이 많은 지대이었다. 1시간 정도를 달려서 도착하였는데 유적지 입구를 지나치는 바람에 남문에서 파는 입장권을 사려고 한참 걸어서 내려왔다. 

날씨가 쌀쌀하고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서 왼쪽 경마장을 끼고 300m정도의 길을 따라 인포메이션 오피스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인포메이션 오피스 뒤에 있는 남문에서 유적지 안으로 입장시켜 주었다.


제라쉬(Jerash)

암만으로부터 48km의 북쪽에 있는 제라쉬는 이탈리아 밖에 있는 로마 건축물의 유적지로서는 가장 크고 아주 잘 보존된 것으로 관심을 끌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 유적지 안에서 6500년이 넘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을 발견했다. 이것은 이 지역이 인류의 거주지로서 아주 이상적이었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제라쉬는 500m의 고도에 위치한 곳으로 기온이 온화하고 주위의 저지대 위에서 일년 내내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제라쉬의 역사는 지중해 유역의 그리스 로마 세계와 아랍 오리엔트의 옛 전통의 혼합이다. 실제로 이 도시의 이름은 이 상호작용의 반영이다. 가장 이른 아라빅/세미틱 거주민들은 그들의 마을을 Garshu라고 했다. 로마 사람들은 늦게 먼저의 아라빅 이름을 Gerasa라고 그리스화했다. 그리고 19세기 말에 아랍과 시르카시아 지방의 거주자들이 Roman Gerasa를 Arabic Jerash로 바꿨다.

BC4세기 알렉산더 대왕 시절에 제라쉬가 상당한 크기의 도시로 발전되었었다. 그러나 로마 통치 시절이 가장 황금시대였다고 할 수 있었다.

로마가 시리아를 정복한 후 로마 폼페이는 제라쉬를 통상과 정치와 문명의 지배력에 의해 맺어진  Decapolis 동맹의 하나로 만들었다. 이것은 커다란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고 상업이 번창하였었다.

AD106년에 Trajan 황제가 부유한 Nanbatean 왕가를 합병하고 Arabia의 省을 형성하였다. 이것은 제라쉬에 건축활동을 흥성하게 하고 커다란 무역의 부(富)가 흘러들게 하였다. 화강암은 멀리 이집트에서 가져왔고 오랜 사원은 최신 건축 양식에 따라 재건축되었었다.   

이 도시의 시민들이 AD129년에 Hadrian 황제의 방문을 환영하여 이도시의 남쪽 끝에 기념으로 개선문을 세웠다. 제사쉬의 번영은 3세기의 초반에 로마 식민의 지위에 있을 때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였었다. 이 ‘Golden age' 기간에 제라쉬에는 인구가 2만명이나 되었었다. 

그러나 3세기 해상 무역로가 개발되면서부터 제라쉬는 통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그 가치가 줄어들었다. 5세기 중엽에는 기독교가 이지역의 중요 종교가 되었고 많은 교회가 들어섰었다. 많은 교회는 이교도의 사원에서 가져온 돌로 지었다.

제라쉬는 AD614년에 Persian의 침공을 받았고, AD636년에는 무슬림에게 침략을 당하고 AD749년에는 연속하여 일어났던 큰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나서 도시가 급속히 쇠락해졌으며 그 인구도 4000명으로 감소하였다. 십자군이 제라쉬에 침공해 왔을 때 제라쉬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고 기술하였고 1806년 독일 여행가 Ulrich Jasper Seetzen이 발견했을 때까지는 폐허로 남았었다. 이 옛 도시는 놀랄 만큼 잘 보존되어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1925년에 발굴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하고 있다.

         ---출처 : Jordan Tourism Board에서 나온 팜플렛 “Jerash" 참조


남문을 들어가서 조금 올라가니 Oval Plaza가 나왔다.  Ovel Plazad 왼쪽의 언덕의 단(壇) 위에 우뚝 세워진 원주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제우스 신전이라 하였다. 제우스 신전에 사용된 기둥들은 위압을 느낄 정도로 장대하였다.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신전 주위에서 복원을 기다리는 누워있는 원주들 위에 걸터앉아 Ovel Plaza를 내려 보았다. 타원형 광장을 에워싼 원주들과 오벨 광장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간 주랑이 장관이었다.  

제우스 신전 주위를 기웃거리는데 어디서 벤드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가 남쪽 극장이었다. 극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밴드소리는 머졌고 악사들은 악기를 챙겨서 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명 되지 않는 구경꾼들만 여기저기에 서성이었다.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남쪽 극장은 물론 복원공사가 있었겠지만 원형이 잘 보존된 것 같았다.

극장에서 Ovel Plaza로 나왔다. 오벨 플라자는 넓이가 90*80M 정도가 되는데 넓은 보도블럭을 AD1세기 때에 만들었다는 이오니아식 원주(圓柱)로 둘러있다. 여기서 포럼(Forum)을 하거나 시장의 기능을 가졌다고 하였다.

오벨 플라자를 둘러보고 북쪽을 800m를 벋어나간 주랑(Colonnaded Street)을 따라 걸었다. 계속 걸어가니 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허물어진 Cathedral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 AD191년에 만들어졌다는 분수 Nymphaeum는 규모가 매우 크고 장식적이다.


다음으로 좌측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서 2세기에 건설된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갔다. 원래는 12개였다는데  11개의 코린트식 열주들만 남아있는 신전이었다. 장대한 원주들이 신비감이 돌았다. 신전을 둘러보는데 장자꾼들이 귀찮게 물건을 사라고 졸라댔다. 그들을 피해서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신전주변에 비잔틴 시대의 교회들이 있었다는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면서 교회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너무 황폐해서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시 계단을 내려와 주랑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로마원형극장에 들어가 보았다. 대체로 남쪽 원형극장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원형극장을 나와서 북쪽문을 둘러보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날씨가 잔뜩 흐려서 비가 오기 전에 암만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매표소 앞 큰길로 나왔다. 마침 암만행 미니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차에 빈자리가 다 채워진 40여분 후에 출발하였다.


저녁에 비가 내렸다. 내일 Petra로 갈 예정인데 날씨가 궂으니 걱정이 된다. 저녁 늦게 사우디 유학생이 페트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페트라는 비가 내리고 무척 추워서 고생을 하였다고 했다. 오늘 밤에는 거기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Hadrian's Arch


제우스신전


Ovel Plaza

Ovel Plaza


Ovel Plaza

South Theatre

South Theatre

Colonnaded Street

Cathedral

Nymphaeum






Temple of Artemis

Temple of Artemis

orth Theatre

orth Theatre

North Theatre


North G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