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Petra)로
2006년 1월 12일 (목) 암만에서는 비. 페트라에서는 맑음
아침 6시 30분에 옆 침대의 서양 녀석이 잠에서 깰까 싶어 조용히 짐을 챙겨 밖에 내놓았다. 어제 밤에 내리던 비가 아침에도 계속 내리고 있다. 오늘 페트라(Petra)로 가는 날인데 빗줄기가 세차고 또 쉽게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6시 30분이 훌쩍 지났는데도 오늘 페트라에 같이 가기로 한 젊은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깨울 수도 없고 로비에서 서성이다가 7시가 조금 지나서 문을 두드렸더니 그때야 일어다. 나는 젊은이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리를 하는 동안 리셉션으로 가서 기다리려고 하였더니, 팔레스타인인 관리인 사베드가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인 사베드는 일본인들에게는 유명하다.
일본사람으로서 이라크에서 처음으로 납치되어 살해된 사람이 이 여관에서 묵었다고 한다. 그때 지배인 사베드가 그 일본인에게 ‘이라크에 가면 납치당하여 살해될 위험이 있으니까 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렸는데, 사베드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라크에 가자마자 납치 살해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여관에는 한국인들도 많지만 일본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관이라 한다. 이 여관의 로비에서는 서양 사람들도 사베드와 살해된 일본인의 이야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남겨놓은 정보 노트를 보면 여관 시설에 대한 불평이 좀 있기는 하지만 사베드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다. 사베드는 가냘프고 인상이 좋고 무던하며 아주 조심스러운 몸가짐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호감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친절하고 자상하다. 그래서 이 여관을 찾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 같다.
우리는 아침밥을 서둘러 해서 먹고, 사우디 유학생과 지배인 사베드의 전송을 받으면서 여관을 나섰다. 밖에는 비가 구중중하게 계속 내렸다. 택시를 흥정해서 1.5dj를 주고 버스 정류장까지 갔다. 페트라까지의 1인당 버스 요금이 2.5dj로 알고 있는데 4dj를 내라는 것이었다. 요르단 운전기사들은 여행자들에게 봉을 씌우려는 못된 마음을 가진 것 같다. 우리가 다른 차를 타고 가겠다면서 건물 추녀 밑으로 가서 비를 피하고 있으려니까 네 명이면 10dj만 내라고 해서 다시 그 버스에 탔다. 엉터리 같은 녀석......... 이 버스도 좌석에 손님이 다 차고 나서야 출발하였다. 1시간 정도는 버스에 타고 기다렸던 것 같다.
페트라에 도착하여 발렌타인 여관에 들어서 한국인들이 쓴 정보 노트를 보았더니 하마에서 만났던 k선생의 글이 있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그런데 k선생은 암만에서 페트라까지 오는 버스 요금을 7.5dj나 지불했다고 하였다. 완전히 바가지를 쓴 것 같았다. k선생님의 다음 행선지를 보니 나와 방향이 달라서 거리가 멀어진 것 같다.
암만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시내를 빠져나와 30분 정도 달렸을 때 비가 그쳤다. 빗속으로 보이던 산들도 물러나고 황량한 사막에 들어섰다. 사막 가운데도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해 놓은 곳이 간간히 보였다. 사막 가운데에 나무를 심고 키우자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황량한 사막 가운데 촌락을 형성한 곳이 많이 보였으며, 풀도 잘 자라지 않는 곳인데 거기에 움막을 쳐놓고 양떼와 함께 생활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어떤 곳은 돌밭이 넓게 전개되기도 하고 또 유달리 검은 돌이 대지에 깔린 곳도 보였다.
11시40분경에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던 버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측 길로 들어섰다. 망망한 사막 가운데를 뚫고 달리던 차가 처음에는 얕은 산굽이를 따라 들어가더니 그 때부터 높고 낮은 굴곡이 심한 협곡을 이리저리 돌고돌아 달리기를 30여분 하여 페트라에 12시 15분에 도착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마땅한 여관을 찾지 못하여 애를 쓰기에 발렌타인 여관에 한번 가보자고 하였더니 그리고 정하고 말았다. 그들의 마음에 들어서 그랬는지 내가 가보자고 하니까 내말을 따르려고 그리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은 오후에 여관에서 쉬었다가 내일 페트라를 관람하기로 하였다. 날씨가 춥지 않고 좋아야 할 터인데----- 여관은 깨끗하고 괜찮은 것 같은데 소문이 나쁘게 나서 선입관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괜찮은 것 같다.
점심을 해결하고 싱가폴 청년 Raymond이 묵고 있는 여관을 찾아가보았더니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외국 사람들과 만나서 페트라에서 늦게 들어올 것 같다고 하여 그냥 돌아왔다.
젊은 사람들이 페트라 관람이 끝난 다음날 와디 럼(Wadi rum)에 갈 계획을 하고 있어서 동행하기로 했다 늙은이가 그들에게 의지하려는 것 같아서 망설였지만 그들도 동행이 많아야 경비도 절약된다면서 흔쾌히 받아주었다. 고마웠다.
저녁에는 우리가 묵는 여관에 한국단체관광객들이 들었다. 서울의 중등교사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관광업체의 주선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여행에 경험이 많은 선생님 한분이 사전에 답사했던 코스를 따라서 여행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이집트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터키를 여행 코스로 잡았다고 하였다. 그 중에 한 여선생이 내가 시리아를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 그룹에서 이탈하여 개인적으로 시리아를 여행한 다음에 터키에서 그룹과 만나기로 하였다면서 시리아 여행에 관한 정보를 문의하여 아는 대로 얘기를 했는데 글쎄......
오늘도 배가 자주 살짝 아파서 좀 괴로웠다.
건강에 주의하여야 하는데 나이가 있어서 그런가, 장기간의 여행이라서 체력에 문제가 생겼는가, 문제가 자꾸 생기는 것 같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몸 관리를 잘 해야 한다.
2006년 1월 13일 (금) 맑음
오늘은 Petra(페트라)를 관람하였다. Petra는 한마디로 장관이다.
요르단은 중동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 나라로서 관광이 주요 수입원이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 제1위를 차지하는 것이 이 페트라라고 한다.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성배’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고 한다. 어제 저녁 여관에서 비디오로 ‘마지막 성배’를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페트라(Petra)
페트라는 고대 나바태안(Nabataean) 왕국의 수도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홍해 지중해를 잇는 무역의 중간지점으로 번영하였다. 나바태안들은 남쪽 요르단에 도착하기 전에 상당한 시간동안 북서쪽 아라비아에 살았는데 중국과 인도를 지중해연안 도시와 그 항구에 닿도록 하는 옛날 아라비아 무역 통로에 위치했던 전략상 상당히 중요한 지역에 살았었다.
그 후 남쪽 요르단에 정착한 그들은 무역 중심지의 명백한 주인으로서 약재, 향신료 실크 아프리카산 상아와 동물가죽 등 짐을 실은 카라반을 보호해 주었다. 카라반 업무의 수익은 그들이 다마커스로 벋어가고 시나이와 네게브(Negev) 사막을 포함하여 아라비아의 많은 부분을 통치하는 힘 있는 왕가를 창설하고 조직하도록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AD106년 로마제국에 합병되면서 200여년 번영하던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향료의 필요성이 줄어들고 무역 통로가 바뀌면서 페트라의 부의 근원이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장엄한 나마태안의 업적인 페트라가 페허가 되고 말았다.
나마태안(Nabataean)들은 영리하고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배타하지 않고 밖에서 들어오는 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고유한 것에 외래문물을 첨가하였다. 고유한 문화와 외래문화의 상호작용의 결과 이상적인 문화로 융해되었다. 페트라에서 어느 조각의 기념물들은 이것을 입증해 준다. 그것은 그리스 로마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토속 양식이 모두 하나로 융해된 것이다.
페트라는 외국과 토속문화의 융합으로 생동감이 있었다. 포장도로가 교차하였고 농경단지, 급수시설 예술 활동 사원 극장 등등....... 역사의 정점에 도달한 후 페트라는 서서히 버려졌고, 1812년 스위스 여행가 요한(Johann Ludwing Burckhardth)에게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완전히 잊혀졌다.
<자료 출처 : Jordan Tourism Board에서 발췌하였음>
페트라를 관람하는 데 하루면 된다는 사람도 있고 ,삼일 정도는 보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하루만 보고 와디 럼 사막 투어를 계획하고 있어서 나도 거기에 맞추어 오늘 하루만 관람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다.
8시 30분경에 페트라 입구에서 티켓(1일 관람료가 20jd<28$>로 너무 비싸다.)을 구입하였다. 표를 사서 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낙타와 당나귀 몰이꾼들이 몰려왔다.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니까 돈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대부분은 배두인이라 하였다. 관광객들이 돈으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는데 좌측 언덕에 오빌리스크 톰브(Obelisk Tomb)가 보였다.
팻말에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기념비로서 동서양 사이의 우아한 결합의 완벽한 전형이라 하였다. 오빌리스크는 명백한 이집트의 영향력이고, 오빌리스크 벽감은 그리스 로마의 영향이라 하였다. 횡와식탁(The Triclinium)은 Nabataean에 있는 것으로 그 목적은 매년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장소로 종교적 제례의 제전이었다고 한다.
Obelisk Tomb를 지나서 조금 더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갑자기 앞을 가로 막는다 As-Siq이다. 그 거대한 바위덩어리 틈이 통로이다. 미로 같은 통로(협곡)가 우뚝 솟은 바위 사이로 나있는데 아침 햇살에 숨었다가는 나타나기를 되풀이하였다. 1km이상이나 되는 깊고도 좁으면서 아름다운 이 협곡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이 협곡의 양쪽 바위는 대체로 붉은 색을 띄었으며 기괴한 모양을 하여 눈길을 때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양 절벽 아래쪽으로 홈을 쭉 파서 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페트라가 사막지역이라서 물이 귀하니까 비가 올 때 물을 모아 한 곳에 저장하여 사용하였던 것 같다.
As-Siq를 1200m정도 내려가다가 앞에 한 건물이 막아섰다. Al-Khazn도(Treasury)이다.
BC 1세기에 나바태안 왕의 무덤으로 만들었던 것인데, 어떤 학자들은 나중에 신전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바위산을 통째로 깎아서 만든 것으로 페트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한다. 2층 건물로 높이 43m, 넓이30m인 이 건물은 독특한 Nabataean의 우아한 촉감에 알랙산드리안 헬레니즘이 가미된 것이다..
이 건물의 이름이 Treasury라고 하는 것은 건물 2층에 Nabataean들이 보석 금 등 각종 귀금속을 저장했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즈네(Khazneh)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가다가 맞은편에 원형 극장이 보였다. 우리는 극장에 이르기 전에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하이 플레이스(High Place)로 올라갔다. 가파른 바위 길을 따라 오르는데 배두인들이 당나귀를 이용하라고 하였다. 또 한참을 올라가니까 배두인의 노랫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들은 거기에서 기념품을 파는 것이었다. 산을 오르는 경관이 좋은 길목마다 배두인들이 자리를 잡고 기념품을 판매하였다. 정상 가까이 올라갔을 때 왼쪽 바위가 파여진 사이에 어린이 둘이 앉아 있기에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원 달라!”라고 외치면서 얼굴을 얼른 가렸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과자를 던져주고 찍자고 했더니 손을 저으면서 못 찍게 하였다. 우리는 하이플레이스에 도달하였다. 다른 관광객들이 이미 좋은 자리를 잡고 주위 경관을 살피고 있었다. 이 하이플레이스는 중요한 나바태안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요한 의식 장소였다. 재래의식을 베풀던 자리들이 잘 보존되어있다. 그리고 장례의식을 치르던 장소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페트라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방으로 펼쳐진 놀라운 경관에 그냥 입만 벌어질 뿐이었다. 하이플레이스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지도를 보지 못하고 다니는 꼴이 될 뻔하였다.
다음에는 정상에서 오던 길로 내려가지 않고 그 너머로 내려갔다. Lion Monument에 이르기 전에 바위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갔는데, 기암기석들이 가는 길을 막았다. 누가 바위에 저렇게 정교하고 아름답게 무늬를 만들고 물감을 칠했을까? Lion monument 부근에도 배두인들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들의 하소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나가야 하는 나도 괴로웠다. Garden Temple Complex의 내부 자연석의 무늬도 아름답고 색상도 고왔다. Roman Soldier's Tomb와 Triclinium들이 있는 곳을 거쳐 산을 돌아 나왔다. 박물관 앞을 지나 골짜기를 따라 20여분을 올라갔다.
정상 가까운 곳에 Deir Monastern이 있다. 바위를 깎아 만든 800개의 개단을 밟고 올라가면 다다를 수 있다고 하였다. 하여튼 30여분을 걸어서 올라갔다. Al-Khaneh와 거의 같은 형태를 가진 건축물이다. 절벽을 깎아서 만든 2층건물인데 AD1세기말 Obodas(모보다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4세기부터는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신전 바로 위에 있는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이스라엘도 보인다고 해서 가파른 산을 올라가려다가 관리인들에게 제지를 당하였다. 관리인이 “당신들 한국인이지?” “신전 위의 산꼭때기로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Deir Monastern에서 나와 북서 방향으로 더 올라가보았다. 산마루에 다다른 곳 그 너머는 아득한 절벽이었고 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은 까만 골짜기였다. 서쪽 해가 기울고 있는 곳의 산악도 대단한 크기로 웅장한 자태를 보였고 주위의 풍광이 모두 웅장하고 기이하여 그 자리를 뜨기가 아까웠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여관에 투숙한 서울 중등교사 팀과 만나서 사진도 찍고 이 장대하고 기이한 광경을 함께 하는 기쁨을 나누었다.
다시 오던 길을 내려가는데 베두인 여인의 구성진 노래가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이 희한하게 생긴 골짜기, 베두인여인의 색깔 배인 노래, 산비탈에 매달려 가시투성이 나무순을 잘라먹는 염소 때와 당나귀를 몰고 산을 오르고 내리는 베두인 소년의 모습이 모두 신비하게만 보였다.
산을 내려와서 박물관에 들려서 몇 개 되지 않는 전시물을 둘러보고 기념엽서를 샀다.
박물관을 나와서 저 앞의 Tomb쪽으로 넓고 곧게 벋어있는 Colonnaded Street로 들어섰다. 이곳이 페트라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수많은 상점이 들어섰었던 시장터였다고 한다. 길옆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몇 개 되지 않는 원주가 서 있고 허물어져버리고 달랑 벽만 엉성한 모습으로 남아있어서 옛날 건물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Colonnaded Street를 지나 앞산 쪽에 붉은 색깔을 띠고 있는 석벽을 조각하여 건물을 만들어놓은 수많은 Tomb로 올라갔다. 이곳은 왕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것으로 페트라에서도 매력적인 건축물로 취급된다. 건물 안을 파고 들어간 곳에는 깎아 놓은 석벽들에 새겨진 무늬와 색상이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놓은 것처럼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다. 이중에서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인 Um Tomb는 Al-Khazneh와 비슷한 규모로 5세기 중엽에는 비잔틴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Tomb를 내려와서 오른쪽 원형극장을 들어가 보았다. 이 극장은 AD1세기경에 Nabataean이 건설한 것을 로마가 확충한 것이라 한다. 이 극장은 8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로마시대의 원형극장 중 바위를 깎아 만든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한다. 깎아서 만든 계단이 지금은 많이 마모가 되거나 풍화작용으로 훼손된 부분이 많고 다른 부대시설들도 파괴된 채 그냥 버려져 있어서 안타까웠다.
극장에서 와서 High Place에서 일몰을 구경하겠다고 다시 올라갔다. 힘들여 올라갔는데 구름 때문에 일몰구경은 허사가 되었다. 그래서 동쪽하늘에서 둥근 달이 떠오르는 것만 보고 내려왔다.
산을 내려와서 Al-Khazneh 부근의 상점에서 모닥불을 피워놓은 베두인이 우리를 불러들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마침 젊은이들은 베두인들과 어울려 놀다가 가고 싶어 하였다. 나는 여관과 멀리 떨어진 곳인데다가 산도 깊고 협곡을 빠져 나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빨리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놀다가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미리 갈 터이니 너무 늦지 않게 뒤따라 오라하였다. 그리고 나는 우리와 하이 플레이스에 함께 올라갔던 선생님 한 분과 함께 여관을 향하여 Al-Siq로 들어서서 걸었다.
하늘에 달이 휘엉청 밝았다. 그러나 Al-Siq는 협곡이라 달빛이 가려서 짙은 어둠 속이었다. 길의 형체만을 따라서 걸어가는데 바닥이 울퉁불퉁하여 걷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불안하였다. Siq를 다 빠져나와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여관까지 4km의 거리를 이용할 교통수단이 없어서 걸어야 했다. 여관에 돌아오니 8시 30분이 지났다.
그런데 방 열쇠를 젊은 친구가 가지고 있어서 그들이 돌아올 때(11시)까지 로비에서 기다려야 했다.
내일 와디 럼으로 가기 위해서 6시 이전에 일어나야 하는데 젊은이들이 시간을 잘 지켜줄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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