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 ‘왕가의 골짜기’
2006년 1월 25일(수) 맑음 <왕가의 골짜기>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짐을 여관에 맡긴 다음에 삐끼 ‘만두’가 주선한 왕가의 골짜기 투어에 참가하였다. 룩소르는 예전에 테베라고 불렀으며 중왕국 신왕국 말기 왕조 시대의 한 시기에 수도로 번영하였었다고 한다. 나일 강 서안(西岸)의 왕가의 골짜기 투어를 하는 동안 안내자의 알아들을 수도 없는 장황한 설명이 지루했다.
왕가의 골짜기는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석회암 계곡으로서 고대 이집트 신왕조(18~20 왕조 BC1567~1085) 시대의 왕들의 무덤이 발굴된 곳이다. 현재 발굴된 무덤은 62개이지만 공개하고 있는 것은 열 개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하나의 티켓으로 세 곳을 관람할 수 있는데, 우리 안네원은 람세스 4세, 람세스 1세 그리고 람세스 9세의 무덤을 안내해 주었다. 안내원들끼리 관광객들의 관람의 흐름을 조정하여 한쪽으로만 너무 많이 몰려서 생기는 혼잡을 피하기 위하여 관람코스를 사전에 협의하여 그런 조치를 취한 것 같았다.
첫 번째로 들어간 곳은 람세스 4세의 무덤이었다. 아부심벨의 신전처럼 전실과 측실 현실이 있고, 여기에 부장물을 안치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다름 무덤과 함께 대부분의 유물이 도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토굴의 모든 벽면에 종교적인 내용의 그림과 상형문자들을 섬세하게 부조해 놓았다. 안쪽에는 장대한 석관이 있는데 석관과 석관 주변 및 기둥 등에 부조한 형상과 그 색상이 선명하다. 과연 그것이 수천 년 전의 것인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이어서 들렀던 람세스 1세와 람세스 9세의 무덤도 비슷했다. 람세스 9세의 무덤을 들어가는 계단은 급경사를 이루어 조심해서 내려가야 했다. 투탕카멘(Tuthankhamen)의 묘는 개별적으로 입장료(10F)를 내고 관람해야 하였다. 햇볕은 따갑고 그늘은 없고 빨리 이 골짜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우리를 본 상인들이 우리에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단속반원들이 그들이 우리에게로 오는 것을 막았다. 벌거벗은 산자락과 작은 언덕에 진을 친 잡상인들은 단속원반들과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어떤 잡상인들은 단속반원들에게 거칠게 항의를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며 공권력에 대항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시절 흔히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 언제까지 쫓고 쫓기는 이런 악순환이 계속될 것인지.......
왕가의 골짜기를 돌아 나오니 12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핫셉슈트 여왕 장제전과 왕비골짜기를 돌아보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한다고 하였다. 제18왕조 핫셉슈트 여왕(BC1503~1482 재위)은 이집트 최초의 여왕이었다. 남편인 투트모세(토토메스) 2세가 죽은 후 첩소생인 어린 투트모세(Tuthmosis)3세의 섭정으로 되었으나, 후에는 스스로 파라오가 되어 통상에 힘을 기울였고 향료를 얻기 위하여 푼트(현재의 소말리아)와 무역을 하였다고 한다. 안내원이 20분 안에 다보고 나오라고 하여 수박겉핥기식으로 돌아보았다.
핫셉슈트여왕 장제전은 뒷산이 병풍처럼 감싸듯이 둘러있는 삼층 신전인데, 멀리에서 바라보아도 장중하고 주위를 압도하는 분위기이다. 이 신전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18대왕조의 대규모 건축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장엄한 것이라 한다. 1층 좌측 벽화에는 카르나크 신전의 오벨리스크에 사용할 화강암을 운송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충에는 풍요를 상징하는 암소신인 하토르 신의 지성소와 아누비스 신의 지성소가 있다. 여왕을 Amun신의 딸로 묘사한 그림도 있다. 3층의 큰 홀은 지성소라고 한다. 그리고 각 기둥에 동상이 모두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9개밖에 없다. 그 동상은 핫셉슈트 여왕이라는데, 예쁘장하고 여성스럽게 생겼다. 그런데 턱에 수염을 달아놓은 것이 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주랑과 테라스 등 내용물이 풍부하고 그 규모도 웅대하여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보았으나 사전지식이 부족하여 무엇을 보았는지 그 실체를 잘 모르고 봉사 코끼리 더듬는 격이었다.
핫셉슈트 장제전을 나와서 왕비의 골짜기로 갔다.
아멘헤르케페세프 왕자의 무덤에 들어갔다. 현실 좌우 벽에는 선명한 그림이 잘 보존되었다. 무덤 안족에 왕자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티티왕비가 유산한 태아의 미라가 잘 보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들을 그냥 스쳐 지나면서 보는 것이 아까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행은 이미 나갔고 나 혼자만 처져 있었다. 그때 누비아 관리인이 다가와서 실내의 그림을 촬영해도 된다고 하였다.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호기심이 발동하여 한 장면을 담았으나 받침대를 가져오지 않아 사진이 잘 찍힐 것 같지 않았고 일행도 다 나갔는데 토굴에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수가 없어 그냥 나왔더니, 누비아 관리인이 나를 잡고 박시시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 장면 찍은 것을 보이면서 그 앞에서 그것을 지워버렸다. 박시시 요구하는 것을 무시하고 그냥 나와 버렸다.
다시 버스를 타고 멤논 거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제18왕조 아멘호텝 3세가 지은 거대한 장제전이 테베에 있던 모든 신전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멤논 거상은 아멘호텝 3세의 장제전의 탑문 앞에 있는 통로 양 쪽에 서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농경지 한 가운데에 덩그렇게 버려진 것처럼 서 있다. 그리고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진 멤논이 사실은 아멘호텝 3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후 이 멤논의 장제전은 나일 강 홍수와 지진으로 파괴되고 또 후대 파라오들이 카르나크 신전을 증축하면서 석재들을 가져가는 바람에 결국은 현재의 멤논 신상만 달랑 남아 있게 된 것이라 한다. 황량한 들판 한 가운데 서 있는 멘논 거상은 거상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거대한 석상은 높이가 거의 22m나 되는데 각각 하나의 돌덩어리를 잘라서 만든 것이다. 북쪽의 조상(彫像)은 이따금 바람이 불면 기묘한 소리를 내어서 고대에 ‘노래하는 멤논’으로, 혹은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멤논을 그리워하던 어머니였던 에오스 여신이 저녁마다 우는 울음소리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완벽하게 복원되어 바람이 불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를 처음부터 안내해주던 삐끼 ‘만두’의 집에 가서 닭도리탕과 삼계탕을 먹었다. 음식이 깔끔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너무 배가 고팠던 뒤라 그런대로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모두 누비안 오아시스 호텔에서 짐을 챙겨가지고 오아시스 호텔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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