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동남아 여행.10 - 위앙짠(Vientiane)

어르신네 2009. 5. 28. 19:03

 

위앙짠(비엔티안:Vientiane)

(현지인의 실제의 발음은 ‘위앙짠’이고 ‘비엔티안’은 알파벳 발음이다.)

 

 

2009년 3월 15일(일) 맑음

자고 일어나니 새벽 4시였다. 잠을 더 청하였으나 허사였다. 엊저녁 소주 마신 것이 조금 문제를 일으킨 것 같다.

 

VIP bus 왕위앙--> 위앙짠

오늘은 왕위앙에서 라오스의 수도인 위앙짠으로 왔다. 어저께 버스 티켓을 여관 마듬에게 7만 킵주고 샀는데 이른 아침 마을 돌다가 어느 곳엔가 6만 킵이라고 쓰인 것이 보였다. 이 집 주인 여편네가 여우처럼 눈꼬리로 흘리는 눈웃음이 예사롭지 않더니 거기에 또 한 번 당한 기분이다. 7만킵! 그러나 서비스 차가 여

 관에서 터미널까지 데리고 가는 서비스를 하여 그 값어치는 한 것 같기도 하다.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카르스트 지형이 연출한 왕위앙의 아름다운 산들을 뒤로 하고 남으로 달렸다. 왕위앙이라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5일 간을 묵었으니 왕위앙의 자연에 어지간히 매료되었나 보다.

 

왕위앙이 멀어지면서 길이 외틀어지고 작은 산협들을 끼고 굽이굽이 이리저리 돌돌아갔다. 그리 높지 않은 산들 사이에 호수도 보이고 닽은 산협으로 민가들이 줄을 이었다. 훼이싸이에서 왕위앙에 올 때까지는 심산유곡(深山幽谷)을 헤쳐 내려왔다면, 왕위양에서 위앙짠까지는 얕은 산과 구릉과 호수를 끼고 내려온 것 같다. . 평야지대에 들어서면서 밀집한 인가들이 위앙짠에까지 이어졌다. 버스가 평야지대에 들어서서도 위앙짠에 도착할 때까지 1시간 이상을 달렸다.

 1시간 이상을 달렸다. 왕위앙에서 10시 조금 지나서 출발한 vip 버스가 터미널로 가지 않고 시내 중심지에 도착하여 우리가 내린 시간은 오후 2시 경이었다. 지도를 따라 한국인이 경영한다는 Dok restaurant에 갔더니 방이 없다면서 한국인 경영하는 RD라는 게스트 하우스로 안내해주었다

 

RD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 거리

 

도미토리가 5만 킵이다. 방값이 만만치 않다. 침대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아마 젊은 서양인들은 하루저녁 정도 머물러보곤 달아날 것 갔다.

 그러나 내가 조금 늦게 왔더라면 이런 도미토리도 못 구하고 중심지에서  멀리떨어진 곳으로 가서 방을 찾아 헤맬 뻔하였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동양 늙은이 2명이 들어있었다. 사이공에서 온 ‘웬’과 쿠알라룸푸르에서 온 ‘수’라는 영감이--

 

 이 여관에서 전직 교사 출신 여행자를 만났다. 그는 위앙짠에 온 지가 여러 날이라서 시내 지리를 익히 알고 있어,그의 안내를 받아 위앙짠 시내 구경을 나섰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영업점들은 문을 닫았다. 다니면서 지형과 주요 건물의 위치만 확인하였다. 위안짠에서는 변변한 볼거리가 없다고 한다. 내일 시내를 돌아보고 하루 더 쉬었다가 베트남으로 가려고 생각을 하였다.  

 

 

 시내중심지에 있는 탑과 분수대

 

아침에 공원에 나와 체조하는 사람들

 

 

위앙짠에서 메콩 가을 또 만났다  - 메콩 강 건너는 태국 땅

 

  

 

2009년 3월 16일 (월) 맑음

일찍 여관을 나서서 대통령궁 부근에 갔다. 궁내부를 관람할 수 있느냐니까 안 된다고 하면서 사진 촬영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은 어제 저녁에 아무도 없은 곳에서 찍어둔 것이 있는데...

 

라오스 대통령 궁

 

대통령 궁 앞에 있는 와씨사겟에 들어갔다. 와씨사겟은 태국이 라오스를 침략했을 때 위앙짠에서 라오스의 모든 것을 다 파괴했으나 이 사원만은 온전히 보존되었다고 한다. 사원의 본전불당은 중앙에 위치하여 사면의 회랑으로 둘러싸였는데, 회랑에는 200여 개의 동으로 만든 불상둘이 안치되어 있고 벽감에는 작은 불상을 일정한 간격으로 수천 개를 안치해 놓았다.

 

 왓 씨싸겟의 회랑과 회랑의 벽면에 안치해 둔 불상들

 

중앙 불당에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사방 벽면에 벽화를 빈틈없이 그려 놓았는데 칠이 많이 훼손되고 퇴색하였다.

 

 

왓씨싸겟의 본전 불당 

   

왓 씨싸겟

왓씨사겟을 나와서 대통령궁에서 동쪽으로 시원하게 뚫린 길을 따라 올라가서 멀리 빠뚜싸이라는 개선문 같은 것이 길 한 중앙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관찰만 하고 가까이 가보지는 않았다

빠뚜싸이

달랏사오로 들어갔다 ‘딸랏’은 시장이란 뜻이라 한다. 시장 규모가 제법 크다.

노점 음식점의 한 여인이 봉을 잡을 것처럼 나에게 바짝 접근하여 아주 싼값에 팔 터이니 빵을 2만 킵에 구입하란다.

음식점 골목을 좀더 들어가서 포목점과 옷 가게가 상당히 넓게 시장지역을 차지하였다.

   

달랏 사오

 

전통 생할 제품의 하나인 수공예 제품도 볼만하였다.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각종 생활용품들이 많았다. 특히 대나무 제품이 좋아보였다. 전자 제품 가게가 즐비한데 최신 제품도 보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물 간 것들이 많았다.

볼거리를 더 찾아 가다가 사원들은 모두 비슷하고 여러 개를 보면 나중에 어디서 무엇을 보았는지 헷갈릴 것 같았다. 시장 한쪽에 따랏 버스 터미널이 있다.

시장 골목을 왔다가 갔다가 하느라고 다리품을 많이 팔았더니 피곤하였다.

그래서 오후에는 여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통령 궁 앞 도로

 

위앙짠이 이 나라의 수도로서 어느 정도 외형적으로는 거리를 정비하고 분수대를 설치하고 가로수를 다듬는 등 깨끗한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그늘진 모습이 많이 보였다. 변두리의 비포장길에서 날리는 흙먼지 불결한 시장 노점 골목, 음습하고 불결한 뒷골목과 그곳을 생활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기보다는 무엇엔가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이 도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래에는 외국관광객이 많이 몰려온다고 한다.

위앙짠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관광지와 도시에서도 아주 작은 일부만이 직접적인 혜택을 입을 뿐 전체가 고르게 덕을 보기에는 이 사회의 체제상 아직 거리가 먼 것 같다.

 

오후에 여관 로비에 앉아 있는데 몸에 문신을 새긴 사나이가 나에게 인사를 하기에 고개만 끄덕이며 더 이상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몸에 어지럽게 문신을 하고 또 인상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그가 노트와 볼펜을 들고 내 옆에 와서 앉는 것이었다. 매니저가 나에게 “hearing impairments(청각장애자)"라고 귀띔해 주었다. 나에게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아서 나도 굳었던 표정을 눅이고 그를 보았다. 그는 노트에다가 자기는 ‘한국인’라고 써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중간 노란 샤스의 사나이가 교포2세, 우측이 베트남 영감 '웬' 

 

필담을 통해서, 그는 재일교포 2세이며 조총련계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80년대에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북한 여러 지역을 많이 다녀보았다고 하였다. 1994년에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전향하였으며 거주지는 일본이지만 민단 소속으로 한국국적을 가졌으며 한국 여권을 가지고 해외에 나와 있다고 하였다. 아직 미혼으로 태국 우돈타이(Udonthani)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데 태국에서는 외국인이 3개월 이상 채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3개월마다. 라오스에 한 번씩 왔다가 간다고 했다.

여관 냉장고에 독한 술 한병을 넣어놓고 들고 나면서 한 모금씩 마신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오늘 저녁에 소주를 같이 마시자고 해서 한국인 슈퍼마켓 앞에서 한 사람당 진로 1병씩 마셨다. 그리고 나서 한국인 식당 ‘대장금’에서 저녁도 먹고 매주도 마셨다. 내가 필담에 성의를 보여주고 그의 장애 극복정신을 칭찬해 주었더니 무척 좋아하였다. 여관에 돌아와서도 술을 계속하려고 하여 10 경에 침대로 돌아왔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그러자니 그의 생활은 늘 심리적 안정이 없는 긴장의 연속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는 자기 몸에 문신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이 청각장애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강한 사나이로 보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나는 그가 열심히 노력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고 격려해 주었다.

 

2009년 3월 17일 (화) 맑음

여제 저녁에 마신 술이 과했는지 몸이 맑지 않았다. 아침 운동을 하고 여관 부근을 산책하였다. 아침식사는 서울서 온 전직 교사가 사주어 얻어먹었다.

 

시내의 한 사찰

시내 산책을 끝내고 여관에 돌아와서 로비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청각장애인이 내가 오늘 저녁에 하노이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서운했던지 여러 가지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자기가 일본에 돌아가면 부모님에게 내 얘기를 하고 내가 일본을 방문할 경우에 자기 집에서 묵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교포사회에서 알아주는 서예가라고 하였다. 하여간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서울서 온 전직 교사는 왕위앙으로 떠났다. 그는 루앙 프라방까지 갔다가 하노이로 간다고 하면서 연이 닿으면 또 만나자고---.

라오스에서 아름다운 산과 불교 유적지와 소수민족들의 생활 등등 볼거리 그냥 남겨두고 떠나기가 아쉽다. 라오스 사람들은 순박하고 정이 많다. 보름도 안 되는 기간이지만 내가 다닌 여행지 가운데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들로 느꼈다. 라오스의 산들이 대부분 부드럽고 완만하다. 그런 지형적 특성이 사람들의 심성 형성에까지 영향을 끼친 것인가.

 

한국인들(외국인)이 위앙짠에 꽤 많은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라오스에서 사업을 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한다. 토지 건물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임대료도 현지인들의 2배 정도를 지부해야 하는 등 현지인들보다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이 위앙짠에서만 400여 명이 각종 사업을 하고 있다니, 뭔가 이익이 있으니까---.

 

오후 여섯 시에 여관 앞에 온 서비스 차를 타고 남부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거기서 하노이로 가는 국제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가 대우에서 생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던 중고차였다.

터미널에 줄지어 서 있는 버스를 보니 많은 수의 버스가 우리나라에서 중고품으로 팔려나온 것들이었다. 버스에 쓰인 회사명이 한글로 쓰인 것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자칫 우리나라의 한 버스 터미널에 와 있는 착각을 일으킬 만하다.

24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는데 걱정이 된다. 그러나 한번 부딪혀 보자.

버스가 저녁 19시에 남부 터미널을 출발해서 24시 경에 국경 부근에 도착하여 밤을 보낸다고 한다. 그리고 아침에 국경으로 이동하여, 출국과 입국 수속을 승객 각자가 밟기 때문에 국경 통과에 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런 시간을 모두 계산해서 24이라 하니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태국의 치앙콩에서 훼이싸이까지 같이 와서 해어졌던 스페인 사람 Borja Rocha 커플을 만났다. 루앙 프라방의 길에서도 잠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눴는데, 하노이 가는 버스에서 또 만났다. 그들이 먼저 나를 보고 반갑게 찾아와서 하노이에 같이 가게 되어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였다.

 

버스에서 눈을 감고 지금까지 지나온 경로를 더듬어 보았다.

훼이싸이에서 슬로 보트를 타고 메콩 강을 따라 오다가 빡맹에서 1박하고,

루앙 프라방에 1박 2일 만에 도착하였다.

슬로보트를 타고 오는 동안 이르는 곳마다 색다른 강변 풍경에 마음이 빼앗겨 지루하지 않았다.

루앙 프라방에서 왕위앙으로 오는 길에서는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또 다른 희열을 맛볼 수 있었다. 산줄기를 타고 올라간 자동차가 저 아래 계곡을 까맣게 내려다보면서 산마루를 타고 이리저리 돌았다. 버스의 진행 방향이 이 산마루에서 저 산마루로 옮길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았다. 저평 지대로 내려서서도 1시간 이상 내리막길을 달려서 앙위앙에 도착하였다. 왕위앙에서의 카약과 점핑 자전거 트레킹과 케이브(Cave) 探査, 위앙짠에서의 2일간의 유숙 등 라오스에서의 일정이 뒤로 밀려났다. 이제 베트남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산길을 어즈러이 흔들면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시내 중심부의 한 사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