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파(Sa Pa)
2009년 3월 20일 (금) 맑음
새벽 5시경에 라오 까이(Lao Cai) 역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종점인 줄도 모르고 그냥 앉아 있었다. 그런데 열차가 너무 조용하여 침대에서 내려 밖을 내다보니 모두 다 내렸고, 열차 밖에서 역무원이 내리라는 손짓을 하였다. 부리나케 역 광장으로 나와 픽업나온 사람을 만나서 버스에 올랐다. 프랑스 인들과는 사파 어디에선가 다시 만나자라고 하며 헤어졌다.
라오 까이에서 싸파까지 가는 길은 첩첩 산중의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를 돌고 돌아 오르고 또 올라 1시간 만 이상을 달려서 싸파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나를 안내해줄 몽족 여인을 만나 바로 트레킹에 나섰다.
싸파의 거리에 전통복장과 장신구를 하고 나온 소수민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관광객에게 물건을 팔려는 사람들이었다.
싸파의 거리에서
트레킹하는 관광객들과 소수민족 민예품 행상들 - 관광객보다 상인들이 더 많다.
우리는 재래시장을 지나서 버스를 타고 왔던 큰길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나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트레킹인 줄 알았더니 내려가면서 주변 경계를 관찰하고 우리가 오늘 저녁에 잠잘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다랑이 논
가이드가 걸어가면서 주위를 살펴보고, 또 지적해 주는 것도 유심히 관찰하면서 가라고 하면서 걸음걸이에 자꾸 제동을 걸었다. 그 때부터 “여기서의 트레킹은 바로 이것이로구나.”하는 것을 알았다.
나의 몽족 가이드와 몽족 소녀
싸파의 계곡 건너편의 판씨판은 해발 3143m로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판씨판은 산세가 험준하고 웅장하다. 산이 높으니 계곡도 깊다. 계곡 양쪽에 높이 솟은 산의 가파른 비탈에 소수민족들이 일궈놓은 계단식 농지가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비탈진 곳곳의 논밭 사이사이에 있는 가옥들과 놑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와 한가하게 풀을 뜯는 소들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가이드가 어떤 마을을 가리키면서 여기는 자오 족이 사는 마을이고, 또 다른 곳을 가리키며 저기는 몽 족이 사는 마을이라면서 또 어떤 곳에서는 서로 섞여 산다고도 하였다. 그들은 복장만으로도 구분이 되지만, 자기들끼리는 얼굴만 보아도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서로 다른 종속끼리 결혼도 하느냐하고 물으니까 간혹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동족끼리 결혼하게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은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서 소수민족의 마을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고 있다고 한다.
자오족 여인
여행객보다 더 많은 수의 현지 행상인들이 전통상품구매를 하라고 졸라대며 따라붙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팔고자 하는 물건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게 아니라, 볼거리를 알려주고 설명을 하기도 하고 풀과 대나무 가지 등을 활용하여 말이나 새의 모양을 만들어 건너 주기도 하면서 트레킹 하는 동안 우리를 즐겁게 만들었다.
오솔길을 따라 계곡의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출렁다리를 건넜다.
출렁다리
다리 입구와 건너에 기다리고 있던 몽족과 자오족의 복장을 한 여인들이 너도나도 손에 민예품을 들고 여행객에게 다가와서 물건을 팔아 달라고 따라 붙었다. 나는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소녀의 물건을 하나 팔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리를 건너오니 보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2시간 정도 소수 민족 마을 부근을 돌아보았다.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가축이나 짐승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나무로 짠 울타리, 닭과 집오리 사육장, 물건 나르는 도구들 등 그들의 독특한 생활방식, 생활도구 저보다 등치가 몇 배가 되는 소의 등에 올라앉은 어린이 등 이곳에서만이 볼 수 있는 풍경들이 흥미로웠다.
물방앗간
소를 탄 아이
짐을 어께에 매고 나르는 여인
그리고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초등학교 교실에도 들어가 보았다. 호치민 사진과 베트남 국기, 깨끗하게 정리 정돈해 놓고 정성껏 꾸며놓은 교실, 꾸밈없는 어린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초등학교 교정과 교실 교실 중간에 베트남 국기와 호치민 사진이 걸려 있다.
교실에 같이 들어갔던 독일인 부인은 신기한 듯이 교실 여기저기를 놓치지 않고 살펴보는 모습이 진지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묵을 자오족의 한 가정에 도착하였다.
처음에는 나 혼자인 줄 알았더니, 트레킹을 마친 서양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14 여명이나 되었다.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저녁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마을을 돌아 보았다. 어떤 집으로 할머니가 들어가기에 따라 들어갔다.
자오족 할머니의 둘째 아들과 큰 아들의 딸인 손녀
어니 자오족 가정을 방문하여 그 집 아들과 함께 톡한 술을 대접받아 마심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집 안에는 할머니의 손녀와 아들이 있었다. 그들도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이 가정도 자오족 가정이라 했다. 할머니가 내어온 말른 고기안주와 독한 술도 마시고 사진도 찍고,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표정과 몸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유쾌하게 보내다가 돌아왔다. 사진을 부쳐주기로 약속하였다.
저녁을 먹고 술판이 벌어졌다
저녁을 먹고 홈 스테이하는 집에서 내어온 술을 분수없이 몇 잔 마셨더니 주기가 확 올랐다. 서양인들과 술을 마시면서 되지 않는 영어를 꽤 많이 지껄인 것 같다.
하여튼 그들과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술을 마시지 않은 서양 사람도 자리를 지미고 앉아서 이야기하며 저녁시간을 함께 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예의인 것 같았다.
술판도 거의 끝나가고 차가운 밤기운이 느껴져 슬그머니 일어나 잠자리로 들어갔다.
내가 자리를 뜰 무렵 서녀 명이 함께 일어섰는데, 술자리가 계속될 줄 알았더니 금방 끝난 것 같다. 한국의 모 대학에서 영어 강사를 했다는 로버트라는 캐나다 청년이 좀 주량이 많은 것 같았고 그가 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물론 한 몽족 가이드가 되는 영어 안 되는 영어를 주어 섬겨 웃음바다를 만들기도 했지만--- 하여간 오늘은 완전히 국제 인들의 모임이었다.
영국인 2명, 캐나다1인 독일인 내외, 이탈리아인 내외 아일랜드인 4명, 덴마크 여인1인, 스위스 청년1명 그리고 나 모두 14명이 한데 오울려 보낸 멋진 밤이었다.
비싼 호텔에 예약하지 않고 Village Stay한 것이 아주 좋았고 다행이었다.
2009년 3월 21일 (토) 맑음
새벽 이른 시각에 잠이 깨어 뜬 눈으로 새벽을 보냈다. 2층에서 자는 사람이 10명이었는데, 옆에서 자느 사람들을 위해서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하는데, 꼼짝 않고 가만히 있자니 몸이 자꾸 불편해지고 뒤척이고 싶었다. 그렇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보니 오던 잠도 달아나버렸다.
도저히 누워 있을 수 없어서 조용히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계단을 타고 일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출입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내실로 통하는 문만이 빗장을 열 수가 있었다. 빗장을 풀고 내실을 통하여 바캍으로 나갔다.
체조를 간단히 하고 일기를 쓰려고 하는데 이탈리아 사람도 나와서, 내 옆에서 일기를 쓰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비즈니스라고만 하고 구체적인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부부가 1개월 여행 계획을 하고 왔다고 하는데 말이 적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자기 부인한테 대한 배려가 극진하였다. 트레킹을 할 때 부인의 안전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 장사꾼에게서 물건을 사는 것은 모두 부인을 위한 것뿐이었다. 부인은 영어를 못하는지 자기 남편하고만 이야기를 할 뿐 다른 사람과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볼 수가 없었다. 좀 고전적인 동양의 여성상을 보는 것 같았다. 부인은 남편이 하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물건을 살 때도 남편이 부인의 의견을 물어보고 사는데 부인은 남편이 골라놓은 물건을 이의 없이 받아들이면서 좋아하였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온 부부와
그런데 독일인 부부는 좀 달랐다. 서로가 덤덤한 사이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들 부부는 같이 투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이들이라서 그런지, 같이 트레킹하는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고 항상 한쪽으로 비켜서서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부인은 남편보다는 더 활동적이었다. 부인은 신기한 모습이 보이면 온통 거기에 정신이 팔려 그것만 쫓아다녔고 남편은 뒷짐만 집고 서서 부인이 하는 양을 바라만 보았다.
아침 식사를 하고 Ta Van마을(자오족이 사는 마을)을 출발하여 폭포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전개되는 풍경에 대하여 관찰하고 감상하였다.
자연 같은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삶이 보였다. 발가 벗은 아이, 흙발로 다니는 아이, 자연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그 자연을 일구는 농부들, 짐을 나르는 소박한 용구를 사용하는 여인들 등 보이는 모든 것이 이채롭다.
누나와 형이 짊어진 바구니를 이 아기는 머리로 뒤집어 쓰고 있다.
자연 속에 묻혀 사는 마을 아이들
논두렁 길로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기도 하고 미끄러운 황톳길을 오르고 내리기도 하였다. 한결같이 보이는 다랑이 논이 계단처럼 층층이 올라앉은 모습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논두렁 길과 오솔길을 가면서 서양인들의 호기심 발동이 대단했다. 무덤 하나 지나치지 않았고 대나무 담장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다랑이 논, 소몰이, 써래질, 길거리에서 발가벗고 놀고 있는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내 어린 시절의 영상이 겹쳐져서 잊고 있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다른 종족들에 의해 해발 1600m의 고지로 밀려나 이 척박하고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삶을 영위해야 했던 소수민족의 서러움과 한이 저렇게 다랑이 논과 밭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지고 깊어졌을 것이다.
자오족 아이들의 전통놀이 - 손을 서로 맞잡고 상대방을 밀어내고 나무를 타고 넘기
지금은 이 산골에도 밀려드는 현대 문명과 이곳을 찾는 많은 관광객과 접하면서 그들의 기존 사고 체계나 생활의 틀에 생긴 많은 변화로 말미암아 매우 혼란겪으면서 살 것이다.
한국에서 영어 강사를 했다는 로버트의 다리에 상처가 있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어저께 저녁에 과음해서 넘어져 다친 것이라 하였다. 상처가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돈 원화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달러로 바꿔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하여 미안하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달러가 얼마 되지 않아서---
점심을 먹는데 바람이 일어 먼지가 음식을 덮쳐 먹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남겼다.
가이드가 정성껏 만들어 온 것을 다 먹지 않고 남겼더니 실망하는 눈치였다.
먼지가 밥그릇을 덮쳐 못 먹었다고 했지만 알아들은 것인지?
1박 2일 간의 트레킹을 모두 마치고 오토바이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싸파 호텔로 갔다. 헤어질 때 극구 사양하는 것을 작지만 팁으로 1만동 주었다.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라오 까이로 갈 시간이 남아서 싸파 시내를 돌아보았다.
재래시장과 공원, 소수민족들이 민예품을 판매하는 난 시장을 돌아보았다.
짬똔 언덕(Tram Ton Pass)에 올라가고 싶었으나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포기하였다.
소수민족들의 민예품 상설노점
공원 주변 한 카페의 탁자에 앉았던 덩치가 큰 프랑스 인 부부(어저께 트레킹하다가 만난 사람들)가 나를 보더니 “김! 김!”하면서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들의 인사하는 몸짓과 표정에 기분이 좋았다. 나도 그런 인사 습관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원체 뻑뻑하게만 생활해 온 터라 표정과 몸이 굳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들 부부와 같이 앉아 맥주 한 병을 마시고 헤어졌다.
싸파에서 버스가 4시 50분경에 출발하여 라오 까이에 6시00 분경에 도착하였다.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천천히 하고 나니 아직 1시간 3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어디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막연하였다. 열차 티켓을 받아서 역전으로 가보았다.
역전의 한 음식점에서 같이 트레킹 했던 덴마크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7시 30분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나가고 나는 맥주 한 병을 주문하여 마시고 앉아 있다가 7시 30분에 라오 까이 역으로 가서 하노이행 열차에 올랐다.
하노이에서 라이 까이로 올 때 탔던 열차보다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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