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Ha Noi)
2009년 3월 23일 (목) 맑음
프린스 57에서의 하룻밤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방이 눅어서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 프런트에 나와 앉아 있으니까 직원이 미안하다면서 내일 방을 바꿔주겠다고 말했지만, 오늘 아침에 짐을 싸들고 방값을 지불하고 나와서 다른 호텔(프린스 79)로 옮겼다.
11시경 여행사 VIKO에 가서 훼(Hue)로 가는 오픈 버스를 예약하였다(13$).
오늘은 문묘와 호아 로 수용소(Hoa Lo Prison)만 돌아보았다.
문묘를 찾아 가는데 세옴(Xe Om - Xe는 ‘오토바이’라는 뜻, Om은 ‘껴안다’라는 뜻이라 함) 기사들이 끊임없이 자기 오토바이 타기를 부탁했지만 끝까지 걸어 다녔다.
거기를 종횡으로 누비는 세옴(xe-om)들
문묘는 공자를 기리기 위해서 만든 사원이다.
베트남은 장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중국의 간단없는 침략을 받아 지배를 당하기도 하였고, 항쟁에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켜나가기도 하였다. 문묘는 우리나라의 성균관과 같은 곳으로 과거의 우리나라처럼 유교적 전통과 한자를 사용하였던 그들의 과거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금 하노이 거리의 간판이 간혹 한자를 병기하였거나 한자만으로 된 간판도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 알파벳으로 표기가 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이 원래 사용하였던 문자는 한자였는데, 현재 쓰고 있는 문자는 17세기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서 고안된 로만 알파벳이다.
베트남은 아직도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한자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언어체계가 한자와는 일치하지 않아서 한자를 배우기가 어렵기 때문에 국민들의 문맹률을 줄이기 위해서 알파벳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묘 정문
문묘는 베트남 최초의 대학으로서 베트남을 이끌어 간 명사들을 배출한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문묘 안으로 들어가는 길
거북등에 세워놓은 많은 비석은 모두 과거급제자들의 이름을 새기고 그의 업적을 기린 내용이라고 하는데 모두 한자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우측 첫머리 가장 위쪽에 “皇上~”으로 시작하여 내용을 기록해 내려갔다. ‘皇上’은 월남 왕을 칭한 내용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조선조 때에서는 자기 임금을 왕이라 칭하고, 중국의 임금을 천황이라 받들어 칭하여 스스로 중국의 예속하여 있음을 인정해 온 꼴이었는데, 베트남은 자기의 임금을 중국과 대등한 명칭인 ‘황상’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들의 역사가 우리나라보다 한 수 위였을 알 수 있다.
과거급제자들의 업적을 거북등에 올린기린 비석
비석 좌측 상단에 베트남 임금을 황상(皇上)이라고 칭하였다
공자상인가?
붓과 벼룩
그들은 한자로 문자생활을 해 왔었다.
베트남도 중화문화권으로 한자를 빌어 문자생활을 해왔으나 우리와 마찬가지고 한자가 그들의 언어체계와 달라 문자생활을 하는 사람은 일부 지식인층에 한정되었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문맹자였다. 그래서 한자를 버리고 쉬운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다.
문묘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중화문화권이 거의 같은 문제를 안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역사가 담긴 한자를 완전히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은 중화문화권에서 오랜 세월 우수한 문화생활을 해온 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묘에서 나와 호아 감옥소(Hoa Lo Prison)에 갔다. 감옥이 지금은 관광지로 변한 곳이다. 인간에 의해서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가 자행된 곳이 감옥이다.
이곳은 19세기말 프랑스 식민지 정부가 베트남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처형도하고 가두어 두기도한 곳이었다.
독립 운동자들을 처형했던 단두대
호아 로 감옥 --- 족쇠로 죄수를 묵어두었다. (모형)
죄수들을 무쇠로 만든 족쇠로 묶어두었던 감방, 외부와의 접촉은 조그마한 구멍으로만 할 수 있도록 하고 빛이 들어가지 않는 독방 등에서 잔인한 人間事를 보았다. 이 감옥을 돌아본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억울한 역사를 뼈저리게 아파하면서 볼 것이다. 이곳이야 말로 베트남 인들의 애국교육의 현장이 될 분 아니라,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과 독립정신 그리고 자존심이 서려있는 우뚝한 기념물이 될 것이다.
호아 로 감옥의 외벽
이 감옥에서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잡아 가둔 곳이기도 하지만, 미국과의 통일전쟁에서 미국 전투기 조ㅅ정사들을 가뒀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초대 통일 베트남과의 수교대사가 여기에서 포로 생활을 하였고 현재 국회상원 의원 중 한 명도 여기서 포로로 수용되었었다고 한다.
프랑스 식민지 지배 하에서 베트남 국민의 독립 쟁취를 위한 저항정신이 감옥 구석구석에 서려 있다. 우리나라 서대문 형무소를 역사공원화한 것은 이것을 본 뜬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국민의 역사의식과 지향하는 가치가 궁금하였다. 베트남에서 짧은 여행을 하면서 그런 것을 파악한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져 보기만도 못하다. 그런데 미국과 10년 이상 지루한 싸움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 당하였고 생활이 파탄되었고 역사적 자산이 훼손되는 고통과 시련을 안겨주었던 미국과 어떻게 그리 쉽게 국교를 틀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와도 자기들과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적대국이었는데 지금은 우호관계를 맺고 긴말한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자존심도 경제 앞에서는 무릎을 꿇은 것인가? 그들의 적대국이었던 한국 국민의 하나인 내가 오늘 여기 하노이 시내를 활보하게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 우리나라의 경제력 덕분? 베트남인들의 너그러운 포용력? 여하간 Hoa Lo Prison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여간으로 돌아오면서 구시가지의 전통 상품 거리에 갔다. 각종 공예품 거리, 주류만 판매하는 거리, 꽃만 취급하는 거리, 귀금속 거리 등등.....
하노이 구시장 거리
오늘은 종일 걷기만 하였더니 오후에는 무척 피로하였다. 어제 저녁 못잔 잠을 오후에 늘어지게 잤다.
2009년 3월 24일(화) 흐림 간혹 비
지난밤은 모처럼 편안하게 잤다.
새벽에 비가 와서 길을 촉촉이 적셔놓아 거리에 먼지가 일지 않아 좋았다.
체크아웃시간이 11시라서 짐을 챙겨 로비에 맡겨두고 호치민 뱍물관을 향하여 갔다. 호치민 박물관을 가다가 ‘한국베트남친선병원’이란 간판이 보여 들러보았다. 혹시 한국의사를 볼 수 있을까하고 들어갔더니 너무 혼잡하고 사람이 많아서 누구를 찾아본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우리의 의술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이러한 의료 활동이 한국과 베트남이 좀더 친해질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병원을 나왔다.
호치민 박물관은 대통령궁이 바로 옆이라서 경비병들이 거리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호치민 박물관에 도착한 시간은 11시였는데 11에 오전 관람을 마치고 오후 1시 30분에 다시 개관한다고 하여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아쉬운 발걸음을 되돌아 나왔다. 박물관 앞에는 단체관람을 온 초중고 학생들이로 북적였다. 그들은 계단이나 대리석 바닥에 앉아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선생님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이동하기도 하였다.
호치민 박물관
나처럼 시간을 잘못 알고 온 외국인들이 박물관 주위를 돌아보고는 밖으로 나갔다. 호치민 박물관에서 큰 길로 나와서 경비원들에게 대통령 궁 구경은 할 수 없느냐니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통령 궁 앞 거리
호치민 박물관에서 국립미술관으로 가서 관람하였다.
국립미술박물관
미술박물관은 선사 시대의 토기로부터 최근의 도자기를 입구 좌측 건물 1층에 시대 순으로 전시해 놓았는데 도자기를 보니 그들의 문화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실감나게 하였다.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가 고려시대에 와서야 그 진가를 보였는데 베트남의 도자기는 그 훨씬 이전부터 도자기 문화가 발달하였던 것 같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줄은 모르지만 베트남이 다양한 양식의 작품을 보면서 찬란한 문화를 구가했던 민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국립미술관에 전시된 조각작품들
근래의 작품 상당부분이 전쟁을 소재로 한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독립과 외세를 몰아내려는 치열한 역사의식을 소재로 한 것으로 이 나라 국민정신 세계의 일면을 들어내 보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베트남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고 중화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의 유교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던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미술 작품에는 유교와 관련된 작품이 많았다. 불교작품은 본관 1층에 조각품과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그런데 베트남 인구의 80% 이상이 불교 믿고 있다는데 그에 비해 불교 관련 작품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을 나와서 배낭 카버를 사려고 했더니 엉터리없이 비싸서 흥정하여 13,000동 샀다. 그래도 바가지를 쓴 것 같다. T가 낡아서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어 백화점에서 655,000동(6만원 정도)에 샀다. 시중 상회에서는 장사꾼의 말을 믿을 수도 없고, 물건을 고르기도 어렵고, 물건 값 깎는 재주도 없어서 백화점에 가서 비싼 것을 살 수밖에 없었다.
호안끼엠 호수 옆에 있는 조형물
6시에 여행사에서 서비스 차량을 타고 훼(He)로 가는 오픈 버스 정거장에 갔다. 나에게 배정된 자리가 맨 뒤 좌측 끝이라서 엔진소리도 요란하고 차가 덜컹거리기도 하여 불만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타고 가야했다.
처음 여행계획에는 하노이를 넣지 않았다가 여행 도중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하노이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하노이를 빠뜨렸더라면 베트남의 중요한 부분을 못 보고 갈 뻔하였다. 그리고 하노이 여행은 VICO여행사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잘 할 수 있었다. 젊은 사람이 친절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믿음이 갔다. 그런 청년이 있어서 한국은 희망이 밝다.
프린스79 호텔 주방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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