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동남아 여행.34. - 만달레이(Mandalay)에서 인례(Inle)로

어르신네 2009. 7. 12. 22:17

만달레이(Mandalay)에서 인례(Inle)로

2009년 5월 5일 (화) 맑음

오늘이 5월 5일 어린이 날인데 우리 손녀들이 건강하고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손녀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라주기를 기원한다. 막내 손녀 지은이는 요즘은 어떻게 변했을까.......보고 싶다.

 

오늘은 밍곤을 갔다가 올까 어쩔까 망설이다가 포기하였다. 오늘은 대부분의 시간을 미얀마의 불교와 관련된 글을 읽었다. 미얀마의 불교사가 바로 미얀마의 역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태국이나 라오스의 불교도 미얀마와 같은 소승 불교라고 하는데 서민생활의 중심축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깊이 스민 것 같다. 이 지역에서의 불교 신도들은 동일 내용의 經 律 論의 三藏을 잘 받들고 있으며 교리뿐만 아니라 생활 윤리로서도 마찬가지라 한다. 불교가 오랜 역사에 뿌리를 내려 왔기 때문일 것이다.

미얀마에서는 불교의 사상적 이해라든가 불교를 믿어야 하는 이유, 자신이 불교도로서의 역할이나 사명 등에 대하여 따지지 않는다고 한다. 불교는 그냥 일상 생활이나 마찬가지니까 무얼 따지고 어쩌고 할 그런 것이 아니고 밥 먹고 잠자는 일과 똑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존재의의나 가치를 불교라는 종교적 의미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심성이 온화하고 순박하며 관용적이라 한다.

 

   

 만달레이 연인들

 

11시경에 체크아웃 하고 가방을 프런트에 맡긴 다음 코리언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77*25 street에 있다는 지도를 가지고 찾았으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 찾느라고 조금 헤맸다.

이런 열악하고 낮선 이국땅에 와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정ㅇㅇ 사장이 대단해 보였다. 요즈음은 여행 계절이 아니라서 손님이 좀 뜸해졌다면서 식당을 확장해서 게스트 하우스도 겸할 예정이라 하였다. 여하간 날로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였다.

 

 

 만달레이 중앙시장 시계탑(영국 식민지 시절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탑이라 함)과

거리(부근에 대형 재래시장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붐빔) 

  

5시 조금 지나서 터미널로 픽업하는 생태우가 왔다. 이번에도 외국인은 없고 현지인들만 보였다. 여관직원은 에어컨 버스라고 하더니 창문을 열어둔 채로 6시 30분에 터미널을 출발하였다. 좌석이 꽉 찼고 통로에 의자를 놓고 앉아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현지인들처럼 짐짝 취급을 받으며 의자에서 몸을 곧추세우고 앉아 있어야 했다. 차창 너머로부터 들어오는 밤바람이 에어컨이 없어도 시원하였다. 그리고 좌석을 앞에 배치해 주어 뒷좌석보다는 좋았다.

그런데 9시 30분경에 비교적 도로 사정이 좋은 길을 달려오다가 만달레이에서 양곤 사이에 있는 메틸라(Meikhtilar)에서 인례(Inle)로 갈라지는 길로 들어섰다. 인례로 들어가는 포장길이 1차선만 포장이 되어 있었는데 포장길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1시간도 못 달려서부터는 파손된 포장길로 들어서서 차가 덜컹거리고 튀기 시작하였다.

12시경에 비몽사몽간에 밖을 보니 차가 산악지대의 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오르고 있었다. 물론 길은 엉망이었다. 바간에서 만달레이로 오는 길보다 더 험한 것 같았다. 앞좌석에 앉았는데도 이렇게 흔들리고 요동을 치는데 뒷좌석에 앉았더라면 더 힘들었을 것 같았다.

졸다가 눈을 뜨니 새벽 3시였다. 험한 내리막길이었다. 험한 길을 운전기사가 조심조심 운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녁 6시 30분에 만달레이 터미널에서 출발했을 때의 운전기사가 이튿날 새벽 3시가 되었는데도 그대로 운전하고 있었다. 운전기사도 그렇거니와 조수도 출입문에 매달려 오고 있었다. 운전사도 조수도 괴력의 사나이들 같았다. 그러나 운전기사가 밤새도록 혼자서 운전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졸음 운전하다가 이 깊은 산중의 벼랑 밑으로 차를 처박지는 않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들었다. 여하간 인레까지 무사히 운전해 주기를 바라며 운명에 맡길 수밖에....

뒤편과 복도의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그 불편한 좌석에서도 태평스럽게 단잠에 빠져 있었다.

 

2009년 5월 6일 (수) 맑음

새벽 3시에 눈을 뜨니 내리막을 가고 있었다.

맨 앞자리에 앉았더니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정면에서 내 얼굴에 꽂혀서 잠을 깨웠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수효가 늘어나면서 나의 새벽잠을 더 이상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른 새벽인데 이렇게 길도 노면 상태도 나쁘고 험악한 산악 지대에 웬 차량들의 통행이 그리 많은지...... 높은 산악지대라라서 그런지 차창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4시부터는 인레가 가까워진 것인지 노변에 인가들이 보이고 전기불도 제법 많이 보였다. 3시경 눈을 떴을 때부터 내리막길이었는데 5시가 지나는 시각까지 계속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 같았다. 5시에 쉐낭에 도착한다고 하였는데 5시가 지났는데도 차는 계속 달렸다.

중간중간에 많은 사람들이 내렸고 종점에 가서 차가 멈췄을 때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5시경 많은 사람들이 내렸던 곳에서부터는 차가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호수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이렇게 높은 오르막길을 또 오른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직감에 내가 내려야 할 곳을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수에게 미리 ‘쉐낭’에서 내릴 것이라고 얘기를 해 두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종점에 내려서 여기가 쉐낭이냐고 물었더니 내 발음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모두 대답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이른 새벽이라 택시 기사들 몇 명만 나와 있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참으로 답답하였다.

택시 기사에게 인례에 가자고 하였더니 25,000짯을 요구했다. 내가 8,000을 제시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택시 기사 한 사람이 인레로 가는 버스 정거장까지 2,000짯에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인례로 가는 버스가 있구나.’하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그 택시를 탔다. 택시에서 내린 곳에는 버스도 사람도 어떤 시설도 아무 것도 없는 빈 공터였다. 내가 택시기사에게 고함을 쳤다. “ 이 사기꾼놈아!” 하고 화를 내니까 그 기사는 오히려 어리둥절해 하며 쩔쩔매는 것이었다. 1000짯을 동댕이 치면서 이것밖에 줄 수 없다고 하면서 고함을 쳤다. 택시기사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천짯을 주워서 슬그며시 차를 몰고 달아났다.

다른 택시 기사에게 인례에 가자고 하니까 역시 25,000짯을 요구하였다. 그는 이곳은 Taunggyi라면서 인례에 가려면 쉐낭에서 내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따웅지에서 인례에 가는 길은 멀기 때문에 그렇게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마침 낡은 택시 한 대가 보였다. 그와 흥정하여 12,000짯에 인레 호수에 있는 낭쉐에 왔다. 택시 기사가 쉐낭까지 와서 인례로 갈라지는 길을 알려주었다. 따웅지에서 쉐낭까지 온 거리가 쉐낭에서 인레 호수에 있는 낭쉐까지 온 거리보다 더 먼 것 같았다.

 

인레 호수 입구에 있는 한글 간판

 

Gipsi 여관에 숙소를 정하였다. (1박 7$, 인례보트 투어 15,000짯, 양곤 가는 버스 비15,000짯)

주인에게 따웅지까지 갔다가 왔다니까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서 따웅지에서 낭쉐까지 택시비 12,000짯을 주었으면 아주 싼 값에 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침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따웅지에서 낭쉐까지 오는 버스가 있기는 있는데 손님이 꽉 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따웅지에서 인레(낭쉐)가는 버스 정거장까지 태워준 택시 운전수가 아주 엉터리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인례는 해발 800m가 넘는 고지라서 여름에 에이컨 없이도 지낼 만하다고 한다.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였다.

아침나절에는 잠이 오지 않아 낭쉐 시장 구경을 하였다.

 

 

 

 

 

 

 

 

낭쉐 시장과 시장 사람들

 

오늘은 우리나라의 5일 장과 같은 장날이라 한다. 아침 일찍 인례 호수 안쪽에서 물건을 싣고 와서 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들을 따라 시장에 들어가서 홍차도 사고 이곳 사람들이 얼굴에 바르는 재료도 하나 샀다. 시장 안을 한 바퀴 휘돌아다니면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들을 찾아보았으나 여타지역 시장과 다른 것이 없었다. 시장 안에는 사람들의 진솔하고 소박한 삶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관에 돌아와서 한숨 자고나서 책을 보기도 하면서 쉬었다.

 

오후 네 시에 시장 골목에 페스티벌이 있다고 하여 다시 시장 쪽으로 나가보았다. 큰 길 가장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거리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4시 30분경 남쪽 큰 절이 있는 곳으로부터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긴 행렬이 나타났다.

맨 앞에서 남성들이 북을 치고 춤을 추면서 행렬을 이끌었다. 그 바로 뒤에 여인들이 부처님께 공양할 물건들을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긴 행렬을 지어 행진하였다. 나이 많은 여인들의 행렬 뒤에서 남자들이 북을 치거나 악기를 다루며 춤추고 또 그 뒤에는 중년 여인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중년 여인들 뒤에서 또 남자들이 악기을 다루며 춤추고 그 뒤를 또 다른 연령층의 여인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남자들이 춤추고 또 어린 여자 아이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페스티벌 첫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