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사

2017년 11월 5일 오후 11:21

어르신네 2017. 11. 5. 23:31


2017년 11월 5일 (일) 맑음
동생이 며칠 전에 속리산에 등반을 하다가 심장에 이상이 생겨 구급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고 지금은 퇴원하여 집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형이 되어서 찾아가보지도 않고 전화로만 그 상태를 물어 동생의 건강생태를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남만도 못한 형인 것 같다. 그냥 마음만 저미는 듯 아프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제수씨와 질녀들과 함께 행복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즐겁게 살아가기를 기원할 뿐이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남북이 갈리었다. 자유민주주의에 배치되는 사회주의사상을 가졌던 우리 아버지는 재판도 없이 어느 날 새벽 괴한들에게 끌려가 사상범으로 비참한 주검을 당하였다. 그 후 빨지산의 식솔이란 딱지가 붙은 어머니와 우리 남매는 마을 사람들 뿐 아니라 집안사람들로부터도 눈의 가시처럼 취급을 당하였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유복자로 태어난 남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축복은커녕 걱정덩어리처럼 취급을 받았었고 자라면서도 또 그렇게 취급을 당하였다. 어머니는 산후조리도 못하였고 몸도 극도로 쇠약해졌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네 식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흩어져야 했다.

그러다가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 봄에  어머니는 친척에 흩어맡겼던 동생과 나를  다시 모아 셋방을 얻어서 함께 살았다. 육이오 사변 이후의 몇 년 간의 흉년은 우리 식구를 최악의 경지로 몰았다. 6.25 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우리 네식구는 먹을 것이 없어서 몇일씩 굶기가 일쑤였다. 언제인가 우리 네 식구는 사흘동안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방에 누워있었다. 굶어죽기 직전이었다. 우리 네 식구가 아사 직전에 있다는 소식을 접한 먼 외가쪽 친척의 도움으로 아사 직전에서 살아났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그 때의 정황을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그 이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어렵게 삶을 이어가고 있을 때 우리 네 식구는 다시 친척집으로 뿔뿌리 흩어져 살게 되었다. 우리마을과 멀리 떨어진 마을의 어느 가정에서 아기를 낳고 산모가 갑자기 죽었다. 그 집에서 우리 머머니에게 갓 태어난 아기의 유모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침 동생이 아직 모유로 수유하던 기간이었지만 이유가 가능하였다. 어머니는 그 집에 가서 아기를 키워주는  댓가로 우리 삼남매가 다달이 먹을 양식을 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어린 우리 삼남매는 삼촌댁으로 뿔뿌리 흩어져 친척집의 객식구가 되었었다. 아직 모유에 의지하던 남동생은 강제로 이유를 당하면서 어머니의 품마저 잃어버렸던 것이었다. 영양실조와 갖은 병치레를 겪으면서 간신히 어린 생명을 부지해 오던 남동생은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마저 남처럼 받을 수도 없었다. 굶주림에 시달렸던 우리가 이젠 백부와 삼촌  집의 천덕꾸러기 객식구가 되었다. 우리 삼남매는 주위에서 던지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 어머니와도 떨어져 이렇게 산산이 헤어져 살아야했다. 
어려서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던 남동생은 영양 부족에 온 몸에는 부스럼이 나고 이목구비가 성한 데가 없었다. 그 결과로 평생 한쪽 눈의 시력에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동생이 다시 살아난 것을 기적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의 생활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뿐이다.
우리 네 식구가 이렇게 고통스런 생활을 길게 해야 했던 것은 모두 내 탓이다. 어머니의 뼈를 깎는 고생과 여동생을 희생시키면서 어머니는 나를 중학교에 보냈다. 내가 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동생들이 어머니와 게속 떨어져서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생활하여야 했고,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동생들에게 죄인이다. 나이가 들어 인생이 끝날 무렵이 되니 너무 후회되는 일이 많고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올라와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우리가족의 이산은 계속되었었다.
나는 늘 어머니와 동생들과 다시 모여서 살고 싶었다. 나는 1960년대초 학업을 중단하고 일정한 직업없이 떠돌다가 1965년에 학교에 취업하였다. 내가 직장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 네 식구는 드디어 한 집에 모여 함께 살게 되었다. 교촌동에 집을 장만해 놓고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보였다. 생활의 기반은 확고하게 잡히지 않았었지만 우리 어머니, 두 동생과 내가 드디어 한 집에 다시 모여 살게 되었다는 그 기쁨, 그 때가 얼마나 기뻤는지....!!!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속에 옛일들도 희미하게 색이 바래졌다.

그럭저럭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를 모시고 우여곡절 끝에 각자 직장을 가졌고, 각자 가정을 꾸리면서 생활기반을 잡았다. 여동생 내외는 결혼초반은 고생이 많았지만 노후는 자식들의 봉양을 잘 받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하다. 그래도 좀더 행복한 노후가 되기를 바란다.
남동생과 제수씨가 너무나 고마웠다. 특히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동생내외가 직장에 나가는 관계로 아이들을 돌봐주시는 어머니에 대한 제수씨의 남다른 봉양에 대해서도 감사했다. 뿐 아니라 동생에 대한 제수씨의 마음씀이 참으로 감사하다. 남동생 내외가 지금은 직장에서 은퇴을 하였지만 자식들도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고ㅡ 동생내외도 그동안 여러가지 보람있고 건실한 사회활동을 해왔다.  동생의 건강이 정상적으로 회복하여 평소와 같이 활발하게 사회활동도 하면서, 동생내외가 행복하게 회로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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