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여행

65세의 젊은이가 세계를 헤메다<96>이탈리아로

어르신네 2007. 6. 21. 23:59
 


이탈리아로

2006년 2월 7일 (화) 맑음

카이로 국제공항. 새벽 2시에 짐 검색을 받은 다음 출국장으로 나갔다. 출국장에서 출국담당관이 내 비행기 탑승 티켓을 가지고 Alitali 항공 탑승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으니까 못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탑승권은 'Free'라는 것을 알려 주었더니 탑승권을 한참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통과시켜주었다.


항공사는 출국장 안에 있다. Alitali 항공사 직원에게 티켓을 보여주었더니 Free Tiket이라 3시 이후에 빈자리가 나면 탑승시켜주겠다고 하였다. 다시 의자에 앉아서 3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드디어 3시 10분 수속을 밟는 승객이 더 보이지 않기에 직원에게 티켓을 내밀었더니 배낭을 부치고 좌석(10C)을 지정해주었다.

비행기는 정각 4시에 이륙장으로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졌다. 얼마 간 자고 깨어보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승무원이 가져다 준 음식을 먹고 또 잠에 빠졌다. 얼마간 더 자고 일어나니 고막이  통증을  일으켰다. 아마 고공에서 급강하하여 고막이 압박을 받은 모양이다. 8시 30분에 밀라노 공항에 착륙하였다.


공항을 나와 풀만 버스를  타고 밀라노 중앙역 앞 버스정거장까지 갔다. 밀라노에서 바로 로마로 가기로 하였다. 밀라노 역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밀라노에 상주하는 사람인데 한국에서 조카들이 베네치아를 구경시켜 주려고 가는 중이라 하였다.  또 한국 외대 학생 박근화 군도 만났다. 그는 이탈리아 어를 공부하는 학생인데 어학연수를 위해서 방학기간에 밀라노에 와 있다고 하였다. 열차호수가 달라서 따로 앉아 가지만 로마 역에서 다시 만나 같은 민박집에 들기로 했다.


11시 출발하여 15시30분에 도착하는 차인데 20분을 연착하였다. (12호차 66번) 그런데 앞뒤 옆에 좌석에 시끄러운 집시 여인들이 탔는데 정말로 시끄러웠다.

열차를 독차지한 듯이 주절대고 웃고 노래하고 또 나에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면서 거의 소란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다. 다른 승객들은 조용히 앉아서 그런 그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아예 무시하고 눈을 감고 앉아서 가는 것이었다. 나도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내 뒷좌석의 손님이 내리자 자매는 그리로 자리를 옮겨 앉아서 웃고 떠들었다. 명랑하고 쾌활한 것인가 아니면 배우지 못하여 교양이 없는 것인가?


깜빡 잠에서 깨었더니 밀라노에서 보이던 눈은 없고 들판이 아닌 산림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산이 꾀 높고 골짜기도 깊었다.

오후 2시 15분경에 피렌체(Firenze)에 도착하였다. 피렌체는 내가 로마를 구경하고 나서 올라오다가 들릴 곳이다. 피렌체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시끄럽던 자매들도 내렸다. 그들이 내린 다음에는 열차간이 절간처럼 조용했다. 차는 15분 간 정차했다가 출발하였다. 피렌체 시가지를 빠져나오는데 10여분 이상이 걸렸다.

피렌체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긴 터널을 만났다. 그 다음부터 여러 개의 터널을 지났다. 우리나라의 중앙선을 타고 가는 것 같았다. 오후 3시 넓은 분지를 달렸다. 좌측에는 그리 높지는 않으나 산간지대에 넓게 포도밭이 보였다. 포도 생산 단지인 것 같았다.


3시50분 기차 길 옆 도로에 많은 차량의 물결이 보였다. 로마가 가까워진 곳이었다. 도시 진입에 대형 간판이 어지러이 세워졌다.

16시 조금 지나서 로마 테르미니 역에 도착하였다. 박 군을 만나 <이모민박집>에 들었다. 1일 18유로 3일분을 지불하였다. 이 민박집에는 주로 한국 학생들이 투숙하고 있어서 로마 투어에 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고 저녁에는 맥주도 양껏 마실 수 있어서 좋았다. 젊은이들 틈에 끼어 있기가 좀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경비를 절약하자니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2006년 2월 8일(수) 흐림

8시에 바티칸을 투어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너무 늦게 일어난 것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조반을 먹고 테르미니 역 9번 홈 앞으로 갔다. 일행이 11명이었다. 8시 10분 경 바티칸으로 떠났다. 지난  밤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서 머리가 맑지 못하고 몸도 무거웠다.

지하철을  타고 바티칸 시티로 가는데 차내가 무척 혼잡했다. 이태리는 소매치기가 많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주위를 살폈다 투어를 이끄는 사람을 따라 바티칸 시티로 갔다. 입구에서 보안점검을 받고 피냐 정원으로 올라갔다.

정원의 중앙에는 지구본 같이 생긴 구형(球型)이 있는데 일그러지고 파손된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인간들이 지구 환경을 파괴한 결과로서의 현상을 보이는 것으로 일종의  경고의 표시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한다. 입구 좌측 중앙 벽면에 세워져 있는 로마 시대의 분수였던 솔방울 조각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입구 우측에는 여러 조각상들이 벽면으로 진열되어 있다.

정원 곳곳에 바디칸 내부 사진을 게시해 놓은 입간판들이 보였는데, 그것은 관광객들이 바디칸 내부를 관람하기 전에 가이드가 설명을 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최후의 심판과 천장벽화(미켈란젤로) 등을 담은 똑같은 사진들을 입간판에 여러 개 게시해 놓고, 단체 관광객들이 건물 안에 들어가서 실물을 직접 보기 전에 가이드를 통하여 사전 지식을 주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다. 만약 모든 단체 관광객들을 실물 앞에 모아놓고 설명한다면 현장이 대 혼잡이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마련한 조치인 것 같았다


입간판 앞에서 ‘천정화’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조각상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폴로 상을 비롯하여 여러 군상의 조각들을 보았다. 조각을 감상하기 전에 라파엘로의 방을 들어갔다. '아테네 학당‘이라는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라파엘로의 방을 나와 조각들을 본 다음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로 가기 위햐여 카펫에 그려놓은 성화와 휘황찬란한 천장화를 보면서 긴 복도의 길을 걸었다.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가서의 행동요령을 안내 받았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선출 선거가 열리는 중요한 장소이다. 이 성당에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천정화(天井畵) ‘天地創造畵’라 그려져 있는 곳이다. 수많은 인파에 이리저리 밀리면서 그 유명한 그림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오래 보려고 목을 빼고 고개를 재켜 천장을 향한 얼굴들이 너무나도 진지하였다. 사전에 설명을 들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 깊고 심오한 뜻까지 찾아내기에는 내 눈이 너무나 얕았다. ‘참으로 대단하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대단하다.....’

시스티나 성당을 나와 도서관복도를 통하여 박물관을 나왔다.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베드로 성당으로 향하였다.

베드로 강장으로 들어서니 광장을 둘러싼 원주와 그 위로 조각해 놓은 성인 상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광장과 오벨리스크들이 돋보였다.


긴 줄을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베드로 성당은 신의 창조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솜씨로 만들어 놓은 것 같지 �다. 어떻게 이런 큰 규모의 성당을 만들었을까! 베드로 성당 안에는 볼거리가 너무나 많다. 사람들은 조금 유명하다는 성물(聖物)읖 찾아 모여들었다. 피에타 상 앞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지 가까이 가서 카메라에 그 상을 담기가 쉽지 않았다. 웅대한 성당의 위용에 압도 되어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기웃거리다가 무엇 하나 제대로 본 것 없이 시간만 보낸 것 같다. 나오다가  성물 판매소에 들려 엽서와 묵주를 샀다.



2006년 2얼 9일 (목) 맑음

오늘은 손녀들에게 엽서를 부쳤다.

그리고 바로 콜로세움으로 갔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콜로세움의 실물을 보니 참으로 대단한 유적이다. 그 규모가 대단하다. 수천 년을 견디느라고 많이 노쇠해졌지만 그 원형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었다. 인간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콜로세움은 현대경기장의 모태가 된 것 같다. 그 구조와 크기가 복잡하고 엄청나다. 1층과 2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좀더 유심히 관찰해보려고 했다.


콜로세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투기장(鬪技場). 정식으로는 ‘플라비우스 원형극장(圓形劇場)’이라고 한다. 플라비우스 황제 때 세워진 것으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하여 80년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 완성하였다. 중세에는 ‘거대한 건축물’이란 뜻으로 쓰였다. 제정기(帝政期) 로마의 복받은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여기에서는 글라디아토르(劍鬪士)의 시합,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다. 직경의 긴 쪽은 188 m, 짧은 쪽은 156 m, 둘레는 527 m의 타원형이고, 외벽(外壁)은 높이 48 m로 4층이며, 하단으로부터 도리스식(式)·이오니아식·코린트식의 원주(圓柱)가 아치를 끼고 늘어서 있다. 내부는 약 5만 명을 수용하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放射狀)으로 설치되어 있다. 콜로세움의 명칭은 근처에 네로의 거상(巨像:colossus)이 있었던 데에 유래한다.

                                                          ------<두산 백과>에서

콜로세움을 나와서 거리에서 아이들에게 부칠 엽서를 샀다. 그리고 한글로 된 이탈리아 4대 도시 유적지의 화보가 노점에 진열된 것을 보니 너무나 반가워서 내용을 잘 살펴보지도 않고 10유로에 샀다. 여관에 돌아와서 내용이 보니 부실하기 그지없다.


콜로세움에서 언덕으로 원주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오르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이 있다. 개선문 좌측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갔다. 콜로세움에 입장할 때 8유로짜리 티켓을 샀기 때문에 언덕 위  팔라띠노(Palatino)를 입장할 수 있었다. 숲이 우거진 녹지인데 이곳은 황제와 기족들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이 언덕에서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리고 멀리 로마 시내도 어렴풋이 조망할 수 있었다.

포로 로마노는 꼰스딴띠누스 대제의 개선문과 깜삐똘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lglio) 사이의 낮은 지대로 공화정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곳이라 한다. 공화정에서 황제 중심으로 정치 활동이 전개되면서 자연 정치의 중심이  빨라띠노 언덕으로 옮아가면서 쇠태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공회당과 신전 등의 유적이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은 폐허로  영욕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이다.


포로 로마노에서 깜삐돌리아(Pizza del Campidoglia)로 올라갔다. 12세기에 건축했다는 세나토리오 궁전의 뜰을 지나 베네치아 광장으로 내려가서 지도를 보면서 뽀뽈로(Popolo) 광장을 향하여 꼬로소 거리(Via del Corso)를 걸어서 갔다.

피자를 사서 점심식사를 대신하고 꼴로나(Colonna) 광장을 지나 계속 걸어서 뽈로뽀 광장에 도착하였다. 생각보다 복잡한 광장이 아니었다. 광장의 여기저기에는 관광객들만 서성이면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였다. 마네킹 차림을 한 사람들이 광장의 여기저기에서 구경거리가 되어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스페인 광장으로 발을 옮겼다. 쇼핑몰에 들어가서 가죽잠바나 하나 사서 입을까 하고 눈에 들어오는 상품의 가격을 물어보았더니 700유로 이상을 주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이하의 것도 있기는 하지만......


스페인 광장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번잡하고 혼란스러웠다. 계단쪽에는 사람들이 많이  앉아서 오후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대부분 여행객들로 보였다.


스페인 광장에서 싼타마리아 성당(Santa Maria della Concezione :일명 해골 사원)을 찾아 많이 헤맸다. 도로에 표시가 없어서 더 힘들었다. 겨우 해골사원을 찾아들어갔다. 사람의 뼈로 실내를 장식해 놓았는데 처음에는 기분이 이상하고 모골이 삐쭉 설 듯하였는데 차츰 익숙해져서 가라앉은 마음으로 실내를 돌아보았다.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였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한 조각의 뼈로 남았다가 먼지가 되어 그 흔적조차 없어질 텐데.


해골 성당을 나와서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나보나 광장이나 구경하고 들어가려고 했더니 엉뚱한 곳으로 가서 헤매다가 마침 같은 민박집에 들어있는 학생들을 만나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민박집에서 내놓은 맥주를 마시면서 학생들의 여행담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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