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 산행
수십 년 전에 경주의 잘 알려진 일반 관광지역인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첨성대 등등은 수차에 걸쳐 대부분 돌아보았었지만 희미한 모습들이 희미하게 기억을 어지럽힐 뿐이다.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지만, 관광단을 따라 귀에 익숙한 유적지의 이름만 미리 알고 눈에 보이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였을 뿐이었다.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우리조상들이 남긴 훌륭한 유적지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이나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그런 것에 대한 생각 없이 무작정 따라다니기만 하였던 것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다.
경주 남산은 20 수년 전에 발간된 유홍준씨의 저서 “우리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경주 남산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지고 줄이어 찾는다고 한다. 나도 언제인가 경주남산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길벗산악회의 경주남산 산행에 참여하여 경주남산 일대에 산재한 주옥같은 우리 문화유산을 돌아볼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하였다.
인천교원공제조합 앞에서 새벽 05시 30분에 출발하여 10시20분경에 오늘의 경주남산 산행 출발 시발점인 용장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드리워졌으나 기온이 등산하기에 아주 적당하였다. 우리는 10시 25분경에 휴게소를 출발하여 용장골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변 포장길을 따라 얼마간 올랐다.
경주 남산은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산이다. 이 남산 골짜기에는 100여 곳의 절터, 80여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어 노천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천우사 부근에서 포장길을 벗어나 ‘이무기능선’으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지만 산세가 부드러웠다. 발에 닿는 흙의 감촉도 좋았고, 타고 올라야 할 만만찮은 바위들이 앞을 막아서기도 하지만, 대체로 바위들이 모나지 않고 미끄럽지도 않아 오르고 내리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위험을 동반한 스릴을 느낄 만한 곳마다 우회로를 만들어 등산객들의 안전을 도모해 놓았다. 또 고위험도의 가파른 바위길이 계속되는 곳곳마다 계단을 설치해 놓아 한결 안전하게 등산할 수 있도록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다.
“이무기 능선” 곳곳에서는 바위들과 소나무들이 묘하게 어우러져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모습들을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힘겹게 오르는 등산객들은 소나무와 바위들이 만들어 놓은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모습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능선을 힘들게 오르다가 인공 전망대뿐 아니라, 사방 경관을 살필 수 있는 툭 불거져 나온 자연 전망대를 만나기도 하여 가슴을 펴고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다.
드디어 11시 45분경에 경주 남산의 최고봉(?)인 고위봉에 도착하였다. 고위봉에는 별 볼거리는 없지만 좀 쉬었다가 가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일정 때문에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칠불암으로 향하였다. 칠불암을 향하여 밋밋한 능선을 따라 내려갔다. 칠불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꽤 가파른 사암 길이었다.
12시 15분경에 우리는 칠불암에 도착하였다. 칠불암 전면이 확 트여 경관이 시원하고 좋았다. 남산의 맑은 공기를 깊게 들여 마시고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살펴 보았다. 이렇게 높고 험한 절벽 한 가운데에 이런 보물을 숨겨두다니! 그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七佛庵磨崖佛像群)
이 불상들은 경주 남산 봉화골의 정산 가까이 위치한 마애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칠불암 마애석불'이라고 불린다. 삼존불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어 굴곡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 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사방불도 모두 연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보살상(菩薩像)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안내입간판 >
칠불 마애불상군이 있는 곳의 바로 위쪽에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절벽의 자연석 판 위의 가부좌를 한 마애보살반가상은 노천 아래에서 천년의 세월을 견디면서도 그 모습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의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선인들의 뛰어난 솜씨는 자연과 예술을 조화시키면서 세월이라는 시간의 힘을 견뎌낼 수 있도록 한 그 지혜가 참으로 놀아왔다.
경주 남산 신선암마애보살 반가상(慶州南山神仙庵磨崖菩薩半跏像)
이 불상은 칠불암 위의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보살상(菩薩像)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곷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臺座)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족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遊戱座) 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출처:안내입간판 >
신선암으로 내려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이영재로 가는 길에 조각을 해놓은 것같이 예쁜 모양의 바위군이 나타나 가는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하였다. 이영재를 지나서 삼화령으로 향하였다. 삼화령에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지나온 경로인 이무기능선을 비롯하여 고위봉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서 바라보이는 고위봉 쪽의 사진을 입간판에 붙여 주요부분을 표시해 놓았다. 주요지점을 잘 표시해 놓은 이 사진에서 우리는 지나온 경로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금오봉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능선과 멀리 좌측 고위봉 사이에 있는 계곡이 용장골이다. 용장골 계곡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면 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9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오후 1시 50분 조금 지나서 용장사터에 도착하였다. 용장사터에는 삼층석탑과 그 아래에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이 자리 잡고 있다.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상은 어떤 절의 소속물이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들이 비록 용장사의 소속 물이었다 하더라도, 자연과 벗하며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물처럼 느껴졌다. 이 석탑과 불상은 전망이 가장 좋으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주는 용장골 중앙의 둔덕에 자리 잡았다. 석탑 앞에 앉아 있으면 앞쪽으로는 넓게 골이 트여있고 좌우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평화롭고 아늑한 별천지에 와 있는 것 같다.
삼층석탑은 온 몸으로 풍진 세월을 굳건히 이겨낸 흔적들이 보였다. 삼륜대좌불은 머리부문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다. 하지만 좌대만 보아도 석불 좌상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섬세했을까, 그 모습이 그려졌다.
칠불암과 신선암에서도 느꼈지만, 그리 크지 않은 바위의 판 위의 마애여래좌상이 풍기는 자태는 바위만큼이나 묵직하여 어떤 자극에도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삼층석탑 (보물제186호 후기)
용장사의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아 산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윗부분이 없어져 탑의 높이가 4.42m밖에 안 되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이며, 동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출처:안내입간판 >
석조여래좌상 (보물:제187호 통일신라 8세기 중엽)
이불상은 높이가 일장 육척인 미륵장유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이다. 삼륜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머리부분은 없어졌다. 이 석불은 독특한 형태의 둥근 대좌뿐 아니라 석불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준다<출처:안내입간판 >
마애여래좌상 (보물제913호 통일신라 8세기 후반)
이 불상은 자연암벽에 조각한 것으로 균형잡힌 신체에 단정한 이목구비가 돋보인다. 얼굴은 풍만하며 귀는 눈에서 목까지 크고 길게, 머리칼은 나선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세계의 선으로 표현된 삼도(삼도)가 뚜렷하다. 옷의 주름선은 얇고 촘촘한 평행선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어깨 바깥 부분에는 글씨가 새겨 있으나 많이 닳아 있어 판독이 어렵다.
<출처:안내입간판 >
우리는 다시 내려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갔다. 2시 45분경에 금오봉에 이르렀다.
우리는 금오봉 정상의 표지석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서 곧이어 삼릉 방향으로 내려갔다. 10분 정도 내려가서 삼릉계곡 마애석가 여래좌상(유형문화재 제158호)을 보았다. 바위 위에 조각한 대형 부처상이다. 넓게 흘러내린 자연석 위에 새겨놓은 자연스러운 대형 부처상은 넉넉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방문객들을 맞아주었다. 우리는 이 넉넉한 덕을 지닌 부처님의 무언의 가르침을 오래 듣고 싶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 여래좌상(유형문화재 제158호)
이 불상은 남산의 금오봉에서 북서쪽으로 뻗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자연암반을 파내어 광배로 삼았으며, 깎아내다가 그만둔 듯 거칠다. 높이 7m로 삼릉계곡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며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떴으며,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 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려고 왼손은 무름에 얹었다. 결과부좌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출처:안내입간판 >
삼릉을 향하여 15분정도 내려가다가 삼릉계석조여래좌상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단아한 석조여래좌상에서 신라인들의 삶의 지향이 보였다. 주변자연석들도 범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우리 선인들은 자연이 종교가 되고 종교가 용해된 그 자연에 의탁하면서 삶의 가치를 높여나간 일면을 보는 것 같았다.
경주남산 삼릉계석조여래좌상
보물 제666호 : 남산의 삼릉계곡 중부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이 불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맺고 연화좌(蓮花坐) 위에 결가부좌한 석불좌상이다. 불상은 불두와 불신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이 불상의 얼굴은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2007~2008년 국립경주 문화제연구소에서 보수 정비하여 뺨과 코 입 등 대부분을 복원하였다. 불상의 몸은 당당하면소도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사(袈裟)는 왼쪽 어깨에만 두루고 오른쪽 어께는 노출된 편단우견(偏袒右肩)식으로 걸쳤는데, 이 가사는 얇게 몸에 밀착하여 신체의 윤곽 등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정강이에서 발목으로 옷 주름이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광배는 간결하면서도 화염문(火焰紋)과 당초문(唐草紋)을 섬세하게 새겨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연화좌는 상대(上臺)에 앙련(仰蓮)을 3단으로 새겼는데 꽃잎 안에 다시 꽃잎을 새겼다. 팔각의 중대(中臺)에는 면마다 안상(眼象)을 두었으나 하대(下臺)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 불상은 풍만하면서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수법, 몸에 밀착시켜 입은 얇은 가사, 발목으로 흐르는 옷주름 등으로 보아 석굴암 본존불상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양식과 수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출처:안내입간판 >
마애석가 여래좌상과 주위를 살피고 나서 선각여래좌상을 보고 싶었으나 다시 올라갔다가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하산 시간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삼릉계곡을 내려갔다. 조금 내려가니 선각육존불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뒤로 붙어 있는 두 개의 바위에 그려놓은 육존불인데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바위면에 선으로 육존불을 그려 놓았다. 참으로 특이한 느낌이었다. 얼핏 모아서는 선들을 어지럽게 얽어놓은 것 같았다. 그러나 자연석 위에 선으로 정교하게 표현한 형상들이 풍기는 생동감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陵溪谷 線刻六尊佛)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석분의 불상이 두 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께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臺座)에 앉아 있다. 머리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새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 손을 들어 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곷 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세 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 분을 석가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종이 서 있고 좌우의 보살은 꿇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菩薩像)은 웃옷을 벗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 쟁반을 받쳐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 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법당(法堂)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출처:안내입간판 >
삼릉계곡을 내려오는 길섶에도 파손된 여래좌상을 비롯하여 탑재와 불상들의 파편들이 보였다. 경주남산에는 앞으로도 계속 문화제가 발굴될 소지가 많다고 한다. 문화재들이 손상되지 않고 영구히 보전될 수 있은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대부분의 인천의 야산에서는 소나무가 사라지고 다른 나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경주 남산은 산 전체가 대부분 소나무로 숲이 조성되었다. 특히 삼릉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은 소나무 숲길이다. 오늘 경주남산 산행의 끝자락 길섶을 도열한 소나무들의 사열을 받으면서 삼릉까지 내려왔다.
오늘 경주 남산을 돌아보면서, 인도에 불교유적지로 유명한 아잔타의 석굴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BC 1세기에서 AD 7세기에 걸쳐 화강암 절벽을 파내어 만들었다는 인도 아잔타의 30여개의 동굴의 조각품들이 생각났다.
아잔타 석굴은 석굴이 있는 산과 맞은편의 산 사이에 와고라 강이 U자형으로 흐르고 협곡인데다가 깊은 산속 외진 곳에 위치하였다. 석굴은 산 중허리에 형성된 띠를 두룬 듯한 화강암층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중허리에 많은 석실들을 만들어 벽면에 불교와 관련된 여러 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아잔타는 한곳에 집중적으로 유적을 조성해 놓았다면, 경주 남산의 유적들은 균형을 맞춰 산의 요소요소에 유적들을 조성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 남산은 안온하고 넉넉함이 느껴지는 덕을 지닌 산이다. 이마애불상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보물들을 처처에 품어 안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보물 산이다. 오늘 경주남산 산행은 시간적으로 쫓기다보니 내 욕심대로 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자연과 예술을 아우러 놓은 자연박물관인 경주남산을 답사하게 된 것은 보람이 일이었다. 오늘의 산행에서 나는 소중한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접할 수 있었고 우리 역사의 찬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느꼈다.
요즈음 내 삶을 돌아보면 삶의 의미조차 잊고 덧없이 시간만 보내는 참으로 한심한 도시속의 일상이다. 게다가 나이 탓만 하는 변명이 타성이 되고 그로 인하여 위축된 몸과 마음이 체념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 늘 이렇게 나날을 보내는 따분한 내 일상에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의 삶을 이어주는 끈이 있다면 인천의 야산들의 둘레길이다. 인천의 둘레길이나마 이용할 수 있는 근력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늘 감사한다.
오늘은 용기를 내어 경주남산을 돌아보는 산행에 참가하였다. 그냥 산행이 아니라 역사기행이었다. 사전에 공부를 하고 떠나야 하는데 천성이 느리고 우둔한 습성이 몸에 배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맹탕으로 산행에 임했다. 길벗산악회에서 마련한 오늘의 산행은 묵은 숙제를 하나 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경주 남산 일원 사적 제311호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이른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쳐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었으며,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불교 관련 유적 이외에도 남산에는 신라의 건국전설이 깃든 나정, 신라 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서라벌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인 남산산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이 간직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여러 전설 설화들이 남산 곳곳에 깃들어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도 할 만큼 신라의 예술 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0년 12월엔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Archeological Area of Namsan Mountain, Gyeongju, Historic side No. 311 Mt, Namsan comprises Mt, Gemao. Located 시 the south of Seorabeol. the ancient capital of the Silla Kingdom. And Mt, Gowi. It stretches 8km from the south to the north, and 4km in width from the east to the west including over 40mountain valleys. Thus, Namsan is often referred to as "an open air museum", and is the Place where the breath of the Silla Kingdom is felt. This mountain has numerous historic relics along with pre-historical relics:the Najeong Well, legendary birthplace of BakHyeokgeose Namsan fortress: King's tomb: and Poseokjeong. In addition, the mountain has countless Buddhist remains. Buddhist relics born out of a marriage between Buddhist faith and the natural environment epitomize Bulgukto, the ideal Buddhist land of the Silla peop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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