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및 기념관

창경궁(昌慶宮)

어르신네 2016. 11. 6. 20:48

창경궁(昌慶宮)

창경궁(昌慶宮) : 본래 창경궁 터에는 1418년에 세운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다. 수강궁은 세종 때 상왕(上王)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편에 창건한 궁이었다. 1483년에 성종이 3명의 대비를 위해 이 터에 크게 궁궐을 다시 짓고 창경궁이라 불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사실상 하나의 궁궐을 이루어 이들을 합쳐서 동궐(東闕)이라 하였고, 후원의 정원도 공동으로 이용했다. 창경궁은 창덕궁의 부족한 생활 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후궁, 공주, 궁인의 처소로도 사용했다. 경복궁처럼 일정한 원칙을 좇아 경영된 궁궐과 달리, 창경궁은 건축 형식과 제도 면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세워지고 이용된 궁궐이었다. 궁궐은 남향이 원칙이지만,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었다. 동쪽에 왕실 동산인 함춘원(含春苑)과 낙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 그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생활공간들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따르면서도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궁궐을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감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다. 임진왜란(1592) 때 서울의 다른 궁궐과 함께 불에 탔다가 1616년에 재건되었다. 이때 다시 세운 명전전 ,명전문, 홍화문 등은 창경궁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 건물들에 속한다. 창경궁의 전성기는 1830년대였다.동궐도(東闕圖)에는 여러 대비궁, 후궁과 공주들의 처소, 궐내각사 등이 촘촘하게 들어서고 곳곳에 정원 시설이 조화를 이룬 당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 안의 건물들을 대부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시민 공원으로 바꾸고, 이름마져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땅의 맥을 끊고 그 사이에 도로를 개설하여 궁궐의 품격을 훼손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비록  아직 많은 유적들을 복원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창경궁의 모습에서 왕실 생활의 채취를 느낄 수 있다. <출처 : 안내입간판>


명정전(明政殿)

국보 제226, 서울 종로구 와룡동

월대 가장자리에는 돌난간을 돌리지 않아 돌난간을 두른 경복궁과 비교할 때 격이 낮아 보이는데, 이것은 창경궁이 정궁이 아니라 이궁(離宮)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평방을 놓고, 기둥 위에는 물론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짜놓아 다포양식을 이루고 있다. 출목은 내외3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날카로운 수서로 되어 있고, 안쪽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어 조선 중기의 공포양식을 잘 보여준다.

가구는 전면 툇간에 고주를 세우고 고주의 웃몸 중간에 퇴보와 대들보를 걸고, 고주 위에 중보의 한쪽을 또 대들보의 다른쪽에 동자기둥을 세워 중보를 걸고 다시 중보 위에 종보를 걸어 키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바닥은 전을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특히 보개천장(寶蓋天障)을 만들고 봉황 1쌍을 목조로 깎아 걸어두었다. 어칸의 안쪽에는 어좌를 만들고 어좌 뒤쪽으로 일월오악병풍을 둘러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용마루는 양성을 했으며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합각마루 끝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을 늘어놓았다. 특히 정면 월대 앞으로는 봉황을 조각한 면석을 놓은 어계가 있고 그 앞으로 어도(御道)가 명정문까지 뻗어 있다. 어도의 좌우에는 문무백관이 조하 때 품계에 맞추어 늘어섰던 품계석들이 있다. <출처 : 백과사전 편찬위원회>



어좌(御座)


명정전 천정에 새겨놓은 봉황



명정문(明政門)


명정전에서 내려다본 명정문. 명정문 앞에 옥천교가 있고 옥천교를 건너면 창경원으로 들어오는 홍화문(弘化門)이 있다.

문정전(文政殿) :




문정전에 있는 어좌


함인정(涵亭)

원래 연산군때 지은 인양전이 있던 터이나 왜란때 타버렸다. 인조가 인조반정후 인왕산 밑에 인경궁에서 헐어다가 옮겨지었다. 함인정 부근은 마당이 넓어 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원래 함인정은 전면 열린공간이 아니었다. 3면은 막힌 공간이었다. 함인정과 환경전 사이에 공묵합이라는 전각이 있었으나 소실되어서 현재는 없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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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景春殿)


환경전(歡慶殿)


경춘전은 대비의 침전이고, 환경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다. 두 건물 모두 1834년에 다시 세웠고 원래는 각기 행각을 두른 독립된 영역을 가졌었다. 경춘전은 왕비의 산실청으로도 쓰여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내부에 탄생전(誕生殿)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었다. 경춘전 현판은 순조 임금의 솜씨이다. 환경전은 종종과 소현세자가 돌아가신 곳이며, 건물 뒤편 북쪽은 여러 대비들의 침전이 밀집해 있었으나 지금은 빈터로 남았다.<출처 : 안내 입간판>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통명전(通明殿)(보물 818호)은 1834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중심 건물답게 넓은 월대를 쌓고 지붕 위의 용마루를 없앴다. 가운데 3간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에 온돌방을 두어 왕과 왕비의 침실로 썼다. 희빈 장씨가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묻어 숙종 비 인현와후를 저주하였다가 사약을 받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통명전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고, 그 사이의 물길을 돌로 공들여 만든 정원이 있다. 1833년에 중건한 양화당(養和堂)은 대비의 침전이지만,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 임금이 환궁하면서 여기에 거처한 일도 있었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영춘헌(迎春軒)

이 일대는 후궁들의 처소가 밀집된 영역이었다. 영춘헌집복헌도 후궁의 거쳐였다. 현재 집복헌은 마치 영춘헌의 서쪽 행각처럼 붙어 있으나 원래는 두 집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1834년에 다시 세우면서 지금처럼 바뀐 것으로 보인다. 사도세자와 순조가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했다. 정조는 영춘헌에서 독서를 즐겼으며 이곳에서 승하했다. 이 건물의 동쪽에 궁녀들의 거쳐로 추정되는 작은 건물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빈터이다.


자경전 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경궁 건너편의 함춘원에 있던 수은묘(사도세자의 사당)를 경모궁으로 고쳐 짓고, 경모궁이 잘 보이는 궁궐 내 언덕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지었다. 통면전 뒤쪽 언덕이 자경전 터이다. 정조는 경모궁을 수시로 참배하였으며, 경모궁으로 이동할 때 번거롭지 않도록 홍화문 북쪽에 담장을 헐고 월근문을 냈다. 눈길을 끌지 않는 문이지만 조선 후기 '문예부흥'과 혁신 청치를 이끈 정조의 깊은 내면, 효심으로 생겨난 궁궐 공간이다.




성종 태실(成宗胎室)및 태실비(胎室碑)

태실은 왕자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태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1928년 즈음에 조선 왕실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당지(春塘池)

춘당지는 창덕궁 쪽 절벽인 춘당대와 짝을 이룬 연못이엇으나 지금은 담장으로 나뉘어 있다.

춘당지는 활을 쏘고 과거를 보던 춘당대(창덕궁) 앞 너른 터에 자리했던 작은 연못(지금의 소춘당지)이다. 지금의 춘당지에는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던 '내농포'라는 논이 있었다. 내농포는 임금과 왕비가 각기 농사와 양잠을 체험할 수 있도록 궁궐 안에 둔 논과 뽕밭이다.  일제가 이를 파헤쳐서 큰 연못으로 만들었고, 1983년 이후에 전통 양식의 연못으로 새롭게 조성한 것이 오늘날의 춘당지이다. 춘당지는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넓은 연못으로, 주변의 숲도 울창하여 많은 새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춘당지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창경궁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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