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및 기념관

2017.06의 창덕궁 후원

어르신네 2017. 6. 27. 22:33

2017.06의 창덕궁 후원

2017.06.23 (금)

인천박물관에서 시행하는 강좌  <庭園>과 관련하여 오늘은 우리나라 궁궐정원의 대명사격인 '창덕궁후원'을 단체로 관람하였다.  


돈화문(敦化門)

보물 제383. 1412(태종 12)에 창건되었고, 1451(문종 1)1506(연산군 12)에 개조하여 더 크게 만들라는 왕명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처음에는 지금보다 작은 규모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는 별궁이었던 창덕궁이 점차 정궁의 구실을 하게 되면서 정문을 보다 위엄있게 만들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광해군 1) 다시 지었고, 1721(경종 1) 동쪽 아래·위층 부연을 수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앞면 5, 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을 한 누문(樓門)이다. 돌계단이 있는 장대석 기단 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은 현재 아스팔트 포장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다른 궁궐의 문이 앞면 3칸인 데 비해 이 문은 2칸이 더 넓으며, 아래층은 12개의 평주와 4개의 고주로, 위층은 12개의 병연주와 2개의 고주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건물이 옆으로 퍼진 느낌을 준다. 다포계로 아래·위층 모두 내3출목·2출목으로 되어 있고, 아래층은 우물천장, 위층은 연등천장이며, 계단은 좌우측 툇간의 끝에 있다.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용두·잡상(雜像)을 올려놓고 사래의 끝에는 토수(吐首)를 씌웠다. 조선 중기 성문건축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궁궐의 누문이다.<출처 : 다움백과>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

후원의 첫 번째 중심지로서, 휴식 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담당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주합루(宙合樓)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였고, 영화당(映花堂)에서는 때로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가 치러지기도 했다. 개인적 휴식을 위한 부용정은 연못에 발을 담그고, 행사를 위한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들도 각각 특색이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서로에게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을 이룬다.



부용지 일원

부용지 : <좌측- 부용정, 정면 소나무 뒤쪽 -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

주합루중앙 높은 곳의 건물은 주합루, 그 앞 좌측은 서향각(書香閣) 우측은 영화당

어수문(魚水門)과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정조 원년(1776)에 창건된 2층의 누각 건물이다.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기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위층에는 누마루를 조성했다.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개발과 이를 위한 도서 수집 및 연구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정적들로부터 끊임없는 질시와 위협에 시달렸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학문연구와 심신 단련에 힘을 써 위대한 계몽군주가 될 수 있었다. 주합루로 오르는 길에는 작은 어수문(魚水門)이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들은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겨진 문으로, 정조의 민본적인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주합루(宙合樓) 현판 - 정조대왕의 어필


영화루 (현판의 글씨는 영조대왕의 어필)





애련지 일대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두 번째공간이다. 숙종 대에 조성한 작은 연못 애련지(愛蓮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공간이다. 장대석 축대를 쌓은 네모 난 연못 애련지가 있고,여기에 숙종 때 지은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근 1간짜리 정자 애련정(哀憐庭)이 있고 가운데는 연잎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금마문(金馬門)이 있고 금마문 안에 4깐짜리의 소박한 건물 의두합(椅斗合)이 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독서와 사색을 위해 궁권 내 세운 유일한 북향건물이다.


 금마문(金馬門)

불로문(不老門) )

애련정(愛蓮亭)

애련지(愛蓮池)





존덕정 일대 

육각형의 이중 지붕이 특징인 존덕정(尊德亭)은 존덕지(尊德池)에 있는 정자로, 인조 때 만들어질 당시에는 육각정이라고 불렀다. 지붕이 부채꼴 모양인 관람정(觀纜亭)이 구조가 간결한 승재정(勝在亭)과 함께 반도지(半島池)에 건립되어 있다. 이 권역에는 왕세자가 독서하던 건물인 폄우사(砭愚榭) 또한 존재한다


존덕정

존덕정과 정조의 교시

존덕정 안 북쪽 벽에 "萬千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제목으로 빽빽하게 쓴 현판이 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98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곧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다.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관람정(觀纜亭)

관람정(觀纜亭)

폄우사(砭愚榭)

폄우사(砭愚榭)

승재정(勝在亭)

승재정(勝在亭)






옥류천(玉流川) 일원


후원 북쪽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시내를 옥류천(玉流川)이라 한다. 1636년,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다듬어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였고 작은 폭포로 떨어져 옥류천이 시작된다. 때로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류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 이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바위에 새겨진 '玉流川' 세글자는 인조의 친필이고, 오언절구 시는 일대의 경치를 읊은 숙종의 작품이다.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농산정(農産亭), 취한정(翠寒亭) 등 간략한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매우 은밀한 정원을 이루었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정의정(淸漪亭)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궁궐 내의 유일한 초가집이다.



소요정

취한정

옥류천

옥류천

옥류천

태극정

정의정




연경당(演慶堂)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에게 진작례(進爵禮)를 올리기 위해 1828년에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했는데, 원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진작례란 신하들이 왕과 왕비에게 술과 음식을 올리는 행사로서 효명세자는 이를 왕권 강화책으로 이용했다. 현재의 연경당은1865년 고종이 새롭게 건립했다. 서재인 선향재(善香祭)는 중국풍의 벽채와 서양풍차양을 설치했다. 뒷마당 모퉁이 높은 곳의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연경당(演慶堂)

농수정(濃繡亭)







창덕궁 향나무 (천연기념룰 제194호)


창덕궁 향나무 (천연기념룰 제194호)

이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5.6m, 뿌리부분 둘레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어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위한 제례의 공간인 것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창덕 그림(동궐도 東闕圖)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 볼 수 있다.










창덕궁 후원 昌德宮後苑

[문화재 지정 : 사적 제122]

개설

면적 103000여 평. 사적 제122호로 지정된 창덕궁 안에 있는 조선시대 정원이다. 조선왕궁의 놀이와 잔치 장소로 활용된 대표적인 조원(造苑)유적이다. 1997년 창덕궁과 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1405(태종 5)창덕궁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고 이듬해인 1406년에는 후원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짓고 그 앞에 못을 팠으며, 후원 북쪽에는 인소전(仁昭殿)을 지었다. 인소전은 1408년에 문소전(文昭殿)으로 이름을 바뀌었으며 이 해에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신주를 모셨다.

문소전 동쪽에는 태조를 위한 원찰(願刹)이 있었는데, 1433(세종 15) 문소전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7명의 승려가 거주하던 원찰은 철거되었다.

세조가 1459(세조 5)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후원에 새로운 못을 팠으며 이 때 열무정(閱武亭)이 건립되었다. 열무정의 위치는 현재의 부용지(芙蓉池) 주변으로, 이곳에는 마니정(摩尼井파리정(玻璃井유리정(琉璃井옥정(玉井) 등 네 곳의 샘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는 사정기비(四井紀碑)가 서 있고, 세조 때 만든 샘 하나가 남아 있다.

1463년창덕궁 후원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1462년에 계획하였던 동쪽 담에 인접된 민가 73()를 철거하고, 다시 북쪽 담에 인접한 민가 58()를 철거하면서 담 밖에 있던 동점(東坫)의 산줄기를 담 안으로 넣기 위하여 100()을 더 뒤로 물린 다음 담을 쌓게 하였다.

이 때 둘레가 4,000척이었으며 도성(都城) 주위의 주민을 징발하여 담을 쌓았는데, 109()1()으로 하여 1통이 25척씩 쌓게 하였으며 모두 160통이 이 일에 징발되었다.

세조실록1467(세조 13) 4월의 기사에는 신모정(新茅亭)이라는 정자가 보이며 1468년 무일전(無逸殿)이 건립되는 등 세조 때에 원유(苑囿)의 시설이 대폭 확장되었다.

연산군은 이 후원에서 여희(女姬)들과 더불어 잔치를 벌이고 새나 짐승을 놓아기르며 사냥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497년에는 사람들이 후원에서 벌어지는 유락(遊樂)을 엿본다고 서쪽 담을 높게 쌓았고, 1503년 동쪽과 서쪽 담 밑에 사는 민가를 모두 헐어냈다. 1504년에는 성균관이 후원에 인접하였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옮기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경회루(慶會樓)와 같은 서총대(瑞蔥臺)를 만들게 하였는데, 높이가 10여 척인 대 위에는 1,000명이 앉을 수 있고 돌난간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이 공사에 감독관이 100, 일꾼이 수만 명 동원되었다고 한다. 서총대 앞에는 경회루 앞과 같이 큰 못을 조성하였고 군인들로 하여금 양강(兩江)의 배를 끌어다가 못에 띄우게 하였다. 그러나 이 못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중종이 즉위하면서 철거되고 말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이 후원은 20년간 폐허가 되었다가 1610년 불타 버린 창덕궁을 복구하면서 광해군은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원에 책방(冊房)을 만들고 별전(別殿)과 소정(小亭) 등을 여러 곳에 짓고 기이한 꽃과 이상한 수목, 괴석을 즐겨 그 기묘하고 사치함이 예전에 볼 수 없는 경관이었다 한다. 이때 영화당(暎花堂)이 건립되었다.

1636(인조 14)에 탄서정(歎逝亭: 뒤에 逍遙亭으로 개칭운영정(雲影亭: 뒤에 太極亭으로 개칭청의정(淸漪亭)을 짓고 옥류천(玉流川)을 가꾸고 어정(御井)을 팠다. 이어 1642년에 관덕정(觀德亭), 1643년에 심추정(深秋亭), 1644년에 육면정(六面亭)인 존덕정(尊德亭), 1645년에 취향정(醉香亭: 뒤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벽하정(碧荷亭: 뒤에 淸荷閣으로 개칭), 1647년에 취승정(聚勝亭: 뒤에 樂民亭으로 개칭관풍정(觀豐亭)이 건립되었다. 인조가 후원에 정자를 많이 건립한 것은 세자가 북경의 궁관제도를 보고 와서 왕에게 알리자 이를 본뜬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1688(숙종 14)에 청심정(淸心亭), 1691년에 능허정(凌虛亭), 1692년에 애련정(愛蓮亭)을 지었다. 1704년에는 명나라 신종을 봉사(奉祀)하는 대보단을 조성하고 1707년에는 척뇌당(滌惱堂)을 건립하였다.

1777(정조 1)에 왕의 영정과 글씨, 보책(寶冊), 인장(印章) 등을 두는 규장각(奎章閣)을 짓고 1792년에는 숙종 33년에 건립한 택수재(澤水齋)를 헐고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부용정(芙蓉亭)으로 바꾸었다.

또 정조 연간에는 옛 열무당 터에 왕의 글씨를 보관하는 봉모당(奉謨堂)을 건립하였다. 1827(순조 27)에 의두합(倚斗閤)을 짓고, 1828년에는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순조에게 존호례를 올리면서 의례를 치르는 장소로 연경당(演慶堂)을 건립하였다. 1921년에는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璿源殿)이 건립되었다.

창덕궁 후원의 명칭에 대하여는 역대 왕조실록에 후원·북원·금원(禁苑) 등이 보이는데 후원이라 부른 것이 가장 많다. 비원(秘苑)이란 명칭은 1904(고종실록 광무 8715)부터 나타난다.

 

내용

이 후원은 북악산의 한 줄기인 매봉을 등지고 자연의 지세에 따라 누정(樓亭)과 연못이 배치되었으며 곳곳에 차고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 후원 서쪽 담 안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는 금천교(錦川橋) 밑을 지나 남으로 흐르고 후원 동북쪽 옥류천 물은 동쪽으로 흘러 나간다. 땅 밑에서 솟아나는 샘물들은 반드시 애련지·부용지를 채우고 다시 넘쳐 흘러서 창경궁 춘당지에 들었다가 창경궁 안쪽으로 흐르다 남쪽으로 나간다.

현재 남아 있는 연못으로는 부용정이 있는 부용지·애련정이 있는 애련지·연경당 앞의 장방지(長方池몽답정(夢踏亭) 앞의 장방지·존덕정 앞 반월지(半月池관람정(觀纜亭) 앞 반도지(半島池옥류천 주위의 청의정이 있는 소형의 못·태극정 앞의 소형못 등이 있다.

 

이들 못 속에는 연꽃을 심고 물고기도 길렀으며, 부용지와 애련지에는 화려한 놀이배도 띄우고 낚시질도 하였다.

못에 물을 넣는 수입구(水入口)는 화강암으로 용두(龍頭)가 조각되어 있다.

1975년에 조사한 거목조사표를 보면 수령(樹齡)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나무는 느티나무 37그루, 은행나무 2그루, 회화나무 2그루, 주목(朱木) 10그루, 밤나무 및 측백나무 2그루와 매화나무·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주엽나무가 각 1그루씩 분포되어 있다.

수령이 1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나무는 느티나무·은행나무·다래나무·주엽나무·주목·회화나무·밤나무·향나무·매화나무·엄나무·수양버들·철쭉·참나무 등이다. 그 외의 오래된 나무는 단풍나무·떡갈나무·신갈나무·때독나무·배나무·뽕나무·앵두나무·귀롱나무·개벗나무·작살나무·느릅나무 등이다. 인공적인 관상수는 심지 않았고 나무에 전지(剪枝)를 하지 않았으며, 또 따로 꽃밭도 만들지 않았다.

 

특징

후원의 괴석들은 정자나 건물의 주위 단()을 지어 만든 공간에 배치되었다. 괴석의 형태는 기이한 바위이거나 선산(仙山)의 형태로서 수성암이나 현무암의 종류가 많다. 괴석은 대()를 받쳐놓았던 것인데, 대는 화강암으로 사각형·육각형·팔각형·원형 등으로 매우 다양하고, 대석에는 사자 등 동물을 새긴 것과 꽃무늬를 새긴 것이 있다. 연경당 안 마당가에는 수련과 같은 수초(水草)를 길렀던 석조(石槽)가 하나 남아 있다.

후원 안에 남아 있는 건물들은 누각·정자·민가양식 등인데 집모양도 사각형·육각형·팔각형·부채형·다각형 등으로 건립되었고, 특히 정자의 난간·포작(包作문살 등에는 기발한 착상과 함께 목조공예의 정교한 솜씨를 다 발휘하였다.

 

의의와 평가

느긋하고 여유 있는 공간이며 스스로 넉넉함을 느낄 수 있는 수양지이고 학업의 수련장이기도 한 비원은 우리나라 조원문화(造苑文化)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 정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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