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이야기

2017.10.05 문학산

어르신네 2017. 10. 5. 22:29

2017.10.05 문학산  


선학역에서 출발하여 길마산으로 오른다. 선학역에서 길마산까지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길마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문학산 정상까지는 약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능선을 따라가다가 정상부분으로 바로 오르지 않고 좌측 계단을 따라가다가 정상으로 오르면 25분 정도 걸린다.

갈마산에서 수봉산 방향

갈마산에서 내려본 문학경기장

청량산 방향

남동공단 방향

연수구

연수구

문학산


인천대교방향

송도신도시 방향






갈마산과 문학산 사이의 능선에서 바라본 ㅡ 갈마산


갈마산에서 문학산으로 가는 길목

갈마산에서 문학산으로 가는 길목








문학산성

文學山城은 인천의 대표적인 관방 시설이다. 테를 두른 듯한 모양의 퇴뫼식 산성으로 정상부분에 石城으로 축조됐으며 미추홀고성’, ‘남산성등으로 불렸다. 처음에는 토성이었던 것이 삼국 말 또는 통일 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이것이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학산서원()

학산서원(鶴山書院)은 조선시대 인천유일의 사액(賜額)서원이다. 1702(숙종28) 이정빈(李廷賓)을 비롯한 100명의 유생이 국왕에게 인천부사 이단상(李端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서원 건립을 상소하여 설립되었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공사가 지연되어 6년이 지난 1708(숙종34)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완공되고 학산(鶴山)이라는 액호를 받아 사액서원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1725(영조1) 이단상의 아들 이희조(李喜朝) 역시 인천에서 선정을 하여 부자의 유풍을 남겼으므로 추가로 배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부자가 나란히 학산서원에 모셔졌다. 현재는 문학나들목 및 터널공사로 원래지형이 심하게 훼손되면서 매장 문화재도 완전히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2004년 학산서원터로 추정되는 자리 근처에 기념표지석을 다시 세웠다.

 






문학산 제사 유적

문학산 제사 유적은 7세기 중반에 건립되어 적어도 고려 초기까지는 운영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제단은 산 능선의 큰 바위 위쪽에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서쪽을 향하도록 설하였다. 제단 위쪽은 기와지붕을 두어 제단을 보호하였고, 문학산성 바깥에 별도의 제사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순화원년(淳化元年,990) 칠월일관(七月日官)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관청에서 직접 제사에 관여한 씨기도 잇었다. 또한, 청동기 시대 화살촉이 함께 출토되고, 조선시대에도 문학산 관련 제사 기록이 나타타는 점 들으로 보아 이곳이 상항히 오랜 기간 제사토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는 주로 바다와 관련된 생업, 바닷길의 안전, 전란으로부터의 안전 등을 기원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호현(三呼峴)

세 번 이름을 부르고 넘어가는 문학산과 연경산 사이에 있는 고갯길을 삼호현 삼해주현사모현이라 한다. 발음에 따라 사모지고개 사모재고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부평역 별리현(비류고개)를 거쳐 이고개를 넘어 능허대로 갔다. 배웅하러 왔던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이별을 했고, 사신들도 삼호현에 오르면 그때까지 별리현에 서 있던 가족들에게 큰 소리로 이별 인사를 세 번 하고 이 고개를 넘어갔다 하여 고개를 삼호현이라 불렀다. 고개 위에 있는 큰 바위를 삼해주바위 중바위 등로 부른다.

옛날에 이 바위에는 물동이 모양으로 패인 부분이 있었는데 여기에 삼해주()가 고여 있어 고개를 넘던 사람들이 갈증을 풀 수 있었다. 한잔으로도 능히 갈증을 풀수 있 욕심을 부려 더 마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술을 두잔 이상 마셨더니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한다. 그 후로는 그 rhroff 삼해주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어느 파게승이 이 곳을 지나다가 술맛이 너무 좋아 한번에 몇 잔을 마신 뒤로는 술이 말라 없어졌다고 하여 중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갑옷바위

갑옷바위는 어떤 장군이 인천에 난리가 나면 이곳을 구원해준다고 하며 이곳 바위 밑에 갑옷과 투구를 숨겨놓고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문학산 안관당을 지키는 당지기(일명무당)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 바위 안에 숨겨놓은 갑옷을 확인하려고 몰래 도끼로 바위를 내리쳤다. 그 순 벼락이 내리쳐 당지기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바위 중간이 깨지면서 갑옷도 사라져 버렸다고 전한다.

 

 





문학산 바로 옆 정상에 정자가 있는 연경산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천시 ㅡ 선학산과  시청이 있는 구월동 방향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천시 ㅡ 수봉공원과 주안역이 있는 방향

문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인천시 ㅡ  연안부두 방향

ㅡ 문학산 정상의 인천시 시가지(인천광역시시청방향) 조망도 ㅡ



문학산 정상 비



문학산 정상



갈마산과 문학산 사이의 능선에서 바라본 선학산과 그 아래 향교가 있는 문학동 


길마산과 문학산의 중간 능선에서 바라본 인천대교

 --- 대교 앞에 지금 짓고 있는 아파트가 완성되면, 대교를 비롯하여 인천 앞바다의 경관을 문학산에서는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 


길마산과 문학산의 중간 능선에서 바라본 연수지구


길마산과 문학산의 중간 능선에서 바라본 논현지구


길마산 정상의 정자


길마산으로 오르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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