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마을
백신2리 윗마을
오랜만에 고향을 다녀왔다.
나의 고향, 백신2리
백신2리는 웃마을과 아랫마을(우실)로 이루어졌는데
나는 웃마을에서 살았다.
친척이 고향에 살고 있을 때는 자주 찾아 갔었는데
친척들이 모두 떠난 후에는 발길이 뜸했다.
이웃하며 살던 사람들도 많이 떠나고,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며
고향을 지키던 동내 어른들과 지인들은 대부분 불귀의 객들이 되었고
고향을 떠난지 58년이 흐른 지금 새대 교체가 되어
만나는 사람들이 낮설기만 하다.
내가 살던 집은 허물어져 없어지고
이웃하던 집터와 합쳐져서 큰 집이 들어섰고
초가집들, 흙돌담들, 돌담들, 나무로 엮어 만들었던 담장들은
낮선 양옥들과 블로크 담장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웃집으로 놀려가던 꼬불꼬불하던 마을길,
자동차도 다닐 수없는 아주 좁은 길이었는데
곧게 널직하게 포장된 길로 바뀌었는가 하면
어떤 길은 없어지고 또 어떤 길은 새로 생겨서
마을의 모든 길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집에 자동차가 있다.
당시에 우리들의 삶과는 상관없던 전기불,
읍내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기불,
마실의 사랑방을 가기 위해서
또
밤품앗이 디딜방아를 찧기 위해
칠흙같은 밤길을 다녔는데,
지금 마을의 길가에는 전봇대가 줄을 지어 섰고
저녁이 되면 전기불이 골목을 환희 비춰 준다.
마을 입구에는 옛날에 없던 정자가 세워졌고
근사한 경노당도 생겼다.
육이오 전쟁 전에는 마을 진입로 뿐아니라
마을에서 경작지로 이어지는 농로들은 모두 오솔길이었고 험로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 진입로와 농로들이 모두 포장이 되었고 반듯하게 만들어졌다.
마을 중간에 조금만 수로가 흘러내렸는데
그것도 복개가 되어 수로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마을에 공동 우물이 하나밖에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부녀자들이 이 우물에서 물을 길러 가정으로 날랐으며
부녀자들이 힘들여 동이에 이고 온 물로 식수는 물론 가정의 생활용수로 사용하였다.
그 우물을 찾아갔더니
지금은 우물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청소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두어서
옛날에 그 좋던 우물이 지금은 식수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 생각만 하고 우물에서 물 한바가지를 마시려 갔다가 헛탕만 쳤다.
백신2리( 웃마을)
소백산이 갈라져 나온 산의 한 자락이 흘러내리다가
아주 아주 조그만 분지가 형성된 곳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육이오 전에는 약 35내외의 가구와 약 150명 안팎의 인구였는데
대부분 빈농이었지만
마을 공동체가 아주 화목했다.
육이오 직후에 마을에 변화가 많았다.
피난 왔다가 고향으로 가지 않고 백신에 눌러 사는 사람도 있었고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삶기 위해
타지로부터 새로 이사를 온 사람들도 있었다.
2014년 9월 28일
마을은 인적마져 느껴지지 않았다.
고향을 찾아올 때면 꼭 찾아 뵙던
이웃하여 살던 먼 친척이 되는 누님이
느릿한 몸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허리는 휘고
합죽이 입에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
엉성하게 남은 푸석한 미리칼
가죽같이 거칠어진 손이 나의 손을 덥석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반겼다. .
저승길이 멀지 않은 서로의 얼굴들을 확인하면서..
고향 백신리에 오면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대부분 외지로 이사를 하기도 하였고
몇몇은 불귀의 객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평생동안 고향을 지키는 한 친구가 있다.
고향에 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친구를 꼭 만난다.
마침 농장에서 돌아온 친구의 집에서
그의 아내가 지어온 정이 듬뿍 담긴 점심밥을 먹으면서
그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옛날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고향이란 단어만 보아도 코끝이 찡하고 그리움이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고향 마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어도 "산천은 의구하다."
고향산천이란 말이 절실히 와 닿는다.
고향산천! 황혼에 찾아온 고향산천, 백신리!
나의 고향 백신!
세월과 함께 마을의 모습과 사람은
많이 달라졌어도
고향산천이 나를 반긴다.
그리고 우물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반은 죽어 모양이 흉칙해졌지만
마을 동쪽 끝의 느티나무가 고향을 지키고 있다.
이젠
알아볼 수 있는 얼굴들이 몇 안 되지만
고향마을에 오면
그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어서
고향의 정을 깊게 맛볼 수 있다.
세월은 사정없이 흐르고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유유자적(悠悠自適) 할 나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고향을 자주 찾아와야겠다.
우물은 옛 우물인데...
정월 대보름 전날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우물을 깨끗하게 청소하였다. 우물 청소가 끝나고 이튿날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마칠 때까지 우물물을 기르는 것을 금했다. 그래서 우물 청소를 하기 전에 각 가정에서는 대보름 마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써야 할 물을 미리 길러놓아야 했다. 마을 제사가 끝나면 신새벽 서쪽으로 지는 달빛에 의지해서 마을 부녀자들이 우물에 나와 경쟁적으로 깨끗한 물을 길러갔다.
그리고 여름 백중놀이(풋구?) 전에도 우물을 청소하였고, 샘물에 오물이 들어갔거나 했을 때도 마을 어른들이 상의해서 우물 청소를 하였던 것이 기억난다.
내가 태어나서 마을을 떠날 때까지 이 우물물을 마시고 자랐다.
고향을 생각할 때면 이 우물이 항상 함께 더오른다
나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이 우물을 찾았다.
이 고향 우물이 그 자리를 영원히 지켜주기를 ~!
마을 경로당
마을 입구에 이런 정자도 세워졌다.
내 기억 속에 육이오 전쟁 때까지 마을 어귀 왼쪽에 미륵불이 있었다. 육이오 사변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미륵불이 사라졌다.
그리고 두드랫재로 가는 길목의 곶집 옆에 어떤 집안의 산소가 있고 그 산소 앞에 여러 개의 비석과 석물(石物)이 장중하게 있었는데 이번 고향에 갔을 때 보니 묘소는 그대로 있는데, 비석과 석물들은 모두 없어졌다. 그리고 고향을 느끼게 했던 마을의 큰 느티나무가 마을동쪽과 마을 뒷쪽에 있었는데 그것들고 사라지거나 반은 죽어 있었다. 이렇게 고향을 느끼게 했던 기념물들이 없어진 것이 안타까웠다.
거의 모든 가정이 차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등새에 옛날에는 없던 집이 한 채보인다.
마을로 올라가는 길섶에서
내가 이 마을에 살 때는 마을 사람들의 생업이 벼와 보리, 조, 콩, 등 곡물류의 농사만 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재래의 농사와 함께 과수원과 특용작물 재배에 크게 의존한다고 한다.
벼가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인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했다.
가장 힘들엇던 벼농사가 생각났다.
이 콩을 보니 느티나무 밑을 지나 개울가에서 개구장이들과 함께 콩사리 해 먹다가 주인에게 혼났던 일이 떠오른다.
아랫마을 우실에서 올려다본 백신2리 웃마을
이 마을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 마을에서 살았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 철로 밑 터널
터널의 반은 마을로 들어오는 도로였고, 반은 물이 흘러내리는 개울이었는데 지금은 물이 흐르던 곳을 복개하여 도로가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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