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다질링(4)<티베트 난민촌>
다질링 초우라스타에서 오서버토리로 가다가 우측으로 내려갔다. 사실은 초우라스타 입구에서 우측으로 밋밋하게 내려가는 길이 있는 것을 모르고 옵서버토리 쪽으로 갔던 것이다. 가파른 갈지자 길을 20여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도 하도 길이 여러 갈래라서 묻고 또 물어서 갔다.
티베트 난민촌의 설립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의 하나이며, 또 본국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의 어려움과 자활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센터이다. 외관상으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것이 외부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티베트인들의 독립의지를 상징하고, 아울러 티베트의 실상을 고발하여 티베트의 독립 투쟁의 당위성을 온 세계에 선전하고 호응을 얻는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강점당했을 때 독립투쟁을 하던 상해 임시정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낮선 타국에서 조국을 일제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시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국제적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독립투사들이 처해 있던 환경은 말할 수 없이 열악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었다. 또 독립운동을 돕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독립운동 단체에 제공하였는가 하면 노예 취급을 받으면서 노동으로 생활하던 해외동포들은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독립운동단체에 기꺼이 제공하여 독립운동을 도왔었다. 때로는 일제의 집요하고 악랄한 추적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웠을 때에는 온갖 역경 속에서 스스로 자금을 마련하여 생활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다.
우리의 독립은 국제적 이해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만이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온갖 곤경을 다 겪으면서도 우리 선조들의 끊임없는 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아니 온 세계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데 게을리 하고 , 우리들의 불타는 독립의지가 투철하다는 것을 온 인류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강대국들이나 세계 지도자들이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우리 민족의 존재는 세상에서 잊혀졌을지 모를 일이다.
지금은 비록 남북이 갈라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오늘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독립투사들의 희생의 결과인 것이다.
티베트 난민들의 자활을 위한 재래식 공장들이 공예품을 생산하여 자체판매 및 수요처에 공급을 하는 모양이었다. 실을 뽑기 위해 물레질을 하는 것, 베틀을 걸어 놓은 것 등이 낯설지 않았다. 꼭 육이오 전에 우리 시골에서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이 하던 물레질과 베틀에 앉아 밤샘을 하던 모습이 거기에 얹혀졌다. 작업장에서 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늙은이들이었다. 젊은이가 있는 곳은 생산품을 진열해 놓고 판매하는 곳과 기부금 받는 곳에서 한두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티베트에서 이곳 다질링으로 망명하여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다질링 거리에서는 우리나라 사람의 생김새와 똑 같은 티베트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초우라스타의 뒤쪽에 있는 어느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았는데 그 중 아주 많은 수의 학생들의 얼굴이 티베트 계통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이 일제시대에 상하이를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던 것처럼 다질링이 티베트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묵었던 Deklling Hotel의 주인도 티베트 사람인데 아마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여관 프런트의 벽에 달라이 라마의 사진도 걸려있고, 라마 승려들에게 무료로 거처를 제공하고(승려들에게는 숙소를 무료로 제공 된다고 하는 말을 종업원에게서 직접 들었음), 또 많은 티베트인들이 그 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티베트음식을 먹기 위해서 찾아다니다가 티베트 승려가 보이기에 티베트 음식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Dekelling Hotel 건물의 맨 아래층에 있다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티베트음식점을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엉뚱한 곳으로 찾아 돌아다녔던 것이다.
이곳에 와 있는 티베트 사람들은 그렇게 서로 연결되고 또 의지하면서 자기 나라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리라.
옛날 고향땅에서 생활해 온 방식대로 물레질과 베틀을 짜는 나이 든 사람들은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서 물러준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거기서 주인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엮어가던 곳인데, 다른 민족이 무력을 앞세우고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며 복종을 강요하게 된 현실을 피해서 임시로 타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조국의 주권을 되찾아서 조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강한 의식을 불사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지에 빨리 적응해 가고 있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도 조국을 광복시켜야겠다는 정신이 굳건히 이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 여행을 하였을 때 가이드로 함께 다니던 동포 청년에게 ‘만약 한국과 중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어느 팀을 응원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당연히 중국팀을 응원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중국 현지에 적응해 있는 젊은 조선족들에게는 한국은 단지 부모가 태어난 곳일 뿐 자기들이 돌아가서 살 조국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질링의 초우라스타의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서로 다른 종족들인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재미있게 지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는 티베트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상당한 수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이 젊은이들도 난민촌에서 고국으로 돌아갈 기약없는 나날을 보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짙은 향수를 가지고 있는 모르겠다. 행여 어린 티베트 학생들도 내가 중국에서 만났던 동포 청년처럼 조상들이 살았던 나라에 대한 애정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Tibetan Refughee Centre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독립열정이 점령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원래의 주인인 티베트인에게 모든 것을 되돌려 주는 날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그들의 조국 독립의지와 열정이 젊은이들에게로 식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티베트 난민촌 <모직제품을 생산하는 작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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