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바라나시(3) <사르나트>
2005년 3월 5일(토) 맑음 6시경 다샤스와메드 가뜨로 나갔다.
많은 여행객들이 어제처럼 보트를 타고 강상에 떠있다. 인도인 순례자들이 줄을 이어 강가로 몰려온다. 그들은 모두 강으로 내려가 강물에 몸을 담근다. 그들은 이른 새벽 차가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 동쪽 하늘을 향하여 주문을 외우는 등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한결같다. 그러나 그들의 성스런 의식이 나에겐 한낱 구경거리로 밖에 보이지 않은 것은 인간의 간특함을 내가 고스란히 마음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참으로 정성스러운 마음을 갖고 성스런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내면에 잠재한 원초적인 의식은 우리나 인도인이나 모두 비슷할 터인데, 형식면에서 인도인의 것이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은 내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우리가 아닌 인도 힌두 사회 구성원들만이 가치를 부여하고 굳게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한 낯설음에서이리라 ......
<간지스강의 일출>
<간지스강 힌두교인들의 성스런 목욕행사>
새벽 차가운 강물에 몸을 담그고 주문을 외면서 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른 새벽에 우리 할머니 어머니가 마당을 말끔하게 쓴 뒤, 그 한 가운데 멍석을 깔아놓고 소반 위에 정성스럽게 정화수를 떠서 올려놓고 하느님께 먼 길을 떠난 가족의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또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했던 모습을 떠 올려보았다. 그리고 사찰이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우리네 어머니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또 대학 입학 시험기간에 어머니들이 대학의 정문에 엿을 붙이는 모습도 떠올랐다.
사람들이 기원하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어떤 의식을 행할 때에는 행위에도 정성이 보여 지지만 마음에 품고 있는 정성이 더 중요하다. 정성은 자기희생과 자기 정화를 바탕으로 한다. 성스러운 고행, 자기 정화의 바탕 위에 행하는 종교의식(宗敎儀式)은 그들이 갈구하고 소망하는 바의 실현을 위한 것이겠지만,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그 정성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치 그 자체이리라.
아침 7시가 조금 지나니 햇살이 살갗에 강하게 닿았다. 성스러운 간지스 강물에 잠긴 강열한 햇빛이 내가 앉아 있는 계단에 반사되어 온다. 강상에는 아직도 많은 보트들이 유유히 떠다니고, 강가에서 성스러운 목욕의식을 마친 힌두인들이 계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우리는 강도가 높아져 가고 있는 햇살에 쫓겨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오늘 오전은 사르나트를 다녀왔다.
사르나트는 불교성지로 석가모니 부처가 보디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이곳에서 설법을 행하셨다고 한다. 이후 아쇼카 황제가 여기에 큰 스투바와 사원을 세웠던 곳이라 한다.
불교 성지 입장료가 100루피였다. 별로 볼거리도 없고 담장 밖에서 대체로 다 관찰 할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하였다. 스투바가 있는 곳에서는 나이가 좀 든 일본인 남녀20여명이 잔디에 앉아서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그리고 부처께서 설법을 하셨던 자리에서는 일본인들인 듯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행을 행하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불자들의 성지로서 이곳을 답사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행동거지가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보였다.
<사르나트 불교 성지>>
우리는 스리랑카 사찰을 둘러보고 우리나라 조계종에서 운영한다는 녹야원을 찾아갔다. 입구에서 600여m 거리에 있다는 녹야원 안내 표지판이 반가웠다.
처음에 녹야원인지 알고 찾아간 곳은 티베트 템플이었다. 티베트 승려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 각종 구조물에 그려놓은 나에게는 좀 생소한 불화들이 보였다. 티베트 템플은 규모가 크고 내부도 여러 장식품과 치장이 화려하였고 모든 게 그럴싸하였다.
티베트 템플
우리는 티베트 템플 마당을 휘돌아 보고 나왔다. 200여 미터 이상을 걸어 나온 곳에 녹야원으로 들어가는 곳에 녹이 나서 흰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녹야원의 안내간판이 보였다. 우리가 조금만 주위를 주의해서 살펴보았더라도 녹야원을 바로 찾아갔을 터인데 좌측에 높이 솟은 티베트 사찰에 이끌려 그리로 좇아가는 바람에 티베트 템플로 갔던 것이다.
우리의 사찰 녹야원에 들어섰을 때 스님 한 분이 현관에 앉아 우리를 맞아주었다. 2층에 올라가서 예불을 드리고 1층으로 내려왔다. 우리와 이아기를 나누던 스님께서 갑자기 볼일이 생겨 밖으로 나가셨다. 우리에게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셨지만 넓은 회랑 안에서 우리만 남아 앉아있기가 거북스러워 곧장 나왔다.
녹야원의 규모는 그런대로 갖추었는데 좀 외진 곳에 위치하였다. 그러나 이만한 우리의 사찰을 만들기 위하여 공역이 얼마나 컸을까를 생각하니 처음 이곳에 사찰을 열기 위해 고생했었을 분들의 노고에 고개가 숙여졌다.
방명록을 보니 백군이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어저께 다른 곳으로 떠났다. 어저께 왔었더라면 다시 한번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녹야원>
녹야원을 나오다가 길 오른 쪽에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나서 들여다보았더니 학교였다. 어린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간이 건물 속에서 나무토막과 널빤지로 대충 만들어 놓은 책걸상을 사용하고 있었다. 시설이 너무나 열악하였다. 우리가 6.25사변 때 천막교실의 맨 땅 바닥에 앉아서 공부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물론 우리들의 그때보다야 훨씬 좋지만 현대의 학교 시설로는 너무 부족하고 빈약하였다. 그러나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눈망울은 참으로 빛나고 있었다.
녹야원 들어가는 초입 쪽으로 나와서 아내와 함께 거리에서 파는 맛살라를 사먹고 시장기를 덜었다. 노천식당이라서인지 불결하기 그지없다. 파리가 탁자에 새까맣게 달라붙었는데 들어가 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주인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선풍기를 틀어주었다. 파리 떼가 모두 달아났다. 우리는 엉거주춤하고 서있으니까 어서 앉으라면서 재촉을 하였다.
맛살라를 4개 주문하였지만 한 개씩을 억지로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거리에 막 나섰을 때 인도에 장기간 체류한다는 여인을 만났다. 그녀는 우리에게 인도에서 물은 미네랄워터를 사먹고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하고 음식물에 특히 주의할 것과 여행을 하면서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위급한 사항이나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사안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대사관에 연락하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우리가 나이가 좀 든 사람들이라 그녀는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일정을 물어보더니 오토릭샤를 잡아서 박물관 관람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가 바라나시까지 80루피에 갈 수 있도록 교섭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고고박물관 건물 초입에 인도의 국장인 사자상이 있다. 사자 네 마리가 네 방향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모습인데 부분적으로 조금씩 손상을 입었다. 사자상(獅子像) 밑받침에는 말, 소, 사자, 코끼리 등을 사면으로 조각해 놓았는데 역시 조금 씩 파손되었다. BC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자상이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 원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것이 얼마나 문화적 가치가 높은지는, 이 사자상이 인도의 國章으로 선정되었고, 인도의 화폐인 루피에도 모두 들어가 있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여간 인도 최고의 아니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주로 불교와 관계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중에는 사르나트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불상이 안쪽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우측에는 대부분 힌두교와 관련된 조각품들을 전시해놓은 것 같았다. 한국 단체여행객을 안내하는 사람이 하는 얘기를 엿들으니, 여기에 전시된 모든 문화재는 사르나트 유적지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불교유적지는 회교도 세력이 침입해오면서 철저히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사르나트에서 바라나시 여관으로 돌아오니 2시가 훨씬 지났다. 한국음식을 한다는 모나리자를 찾아가다가 백군을 만났다. 그와 동행하는 청년도 꼴까따에서 한번 만났던 사람이었다. 그들을 또 만나게 되어 너무나 반가웠다. 백군은 어저께 녹야원에서 지금 동행하고 있는 친구와 함께 바라나시로 나왔으며 오늘 저녁에 자이살메르로 간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들과 또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과 안전여행,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 하면서 헤어졌다.
이 골목은 한번 다녀본 골목이라서 길이 좀 익숙하였다. 그런데 길은 좁은데 통행하는 사람이 많았다. 골목의 가게 앞은 대체로 깨끗하게 쓸어 놓았으나 소가 어슬렁거리다가 배설물을 여기저기에 쏟아놓기도 했고 , 으슥한 곳 여기저기에 악취가 풍기는 오물 덩어리를 개들이 뒤지고 있었다. 골목에는 상점들이 줄을 이었는데 음식점을 비롯하여 옷가게, 인터넷방, 전화방, 요가강습소, 인도음악 강습소, 여관 등등 대부분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들이었다. 또 여행객에게 구걸하는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꾀 귀찮은 존재들이다. 호기심에 작은 골목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미로와 같은 길이 사방으로 뚫려 있었다.
나에게 은밀하게 다가와서 은밀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어느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키가 커다랗고 바짝 말라붙은 녀석이 나에게 다가오더니 ‘하시시(?)!’를 하겠느냐고 물어왔다. 얼른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 눈이 풀려 있는 것 같았고 옷차림이나 그 행색이 평범한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본 것을 승낙의 신호로 받아 들였는지 그는 한 손을 나의 어깨에 얹으면서 골목 으슥한 곳으로 유인하려 하였다. “노, 하시시!”하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나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면서 나로부터 떨어져나갔다. 바라나시에는 여행자를 상대로 은밀하게 마약을 파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모나리자에서 ‘김치볶음밥’을 시켜먹었는데 흉내는 내느라고 했고 맛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런데 아내는 반도 먹지 않고 남겼다. 이 골목에는 모나리자 뿐 아니라 한국음식간판이 많이 보였다. 그만큼 우리나라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다. 그리고 실제로 음식점에서나 골목 구석구석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여관으로 돌아와서 피곤하여 침대에 몸을 맡겼다. 다섯 시 반에 침대에서 일어나 아내와 함께 다샤스와메드 가뜨로 나갔다. 오늘 저녁에 행해지는 뿌자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서였다. 한 번 봤던 것이라 그런지 첫날만큼 큰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볼거리를 또 접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아서 행사가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처음 볼 때는 신비스럽고 성스럽고 호기심이 잔뜩 발동하였는데 두 번 세 번 보니까 좀 익숙해져서 반복되는 동작과 형식이 눈이 보이고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신비로움을 못 느꼈다. 그러나 인도 힌두교인들의 믿음에 대한 진지함만은 대단하였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경찰관들의 활동이 눈에 띌 정도로 삼엄하였다. 행사장에서 발생할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하여 활동하는 것 같았다. 첫날은 의식 진행에 정신이 팔려 주위를 살피지 못했으나 오늘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인가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른 일들이 눈에 잘 들어왔다.
<2005년 3월 5일 밤 뿌자 모습>
뿌자 관람을 끝내고 여관 옥상테라스에 올라가서 Thali 하나만 시켜서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테라스가 시원하여 좀더 앉아있고 싶었으나 일본 젊은이들과 서양젊은이들 틈에 이 늙은이들이 끼여 있기가 거북해서 바로 내려왔다...........
'외국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44. 아그라(Agra)(1) (0) | 2016.02.19 |
---|---|
43. 바라나시(4) (0) | 2016.02.19 |
41. 바라나시(2) (0) | 2016.02.19 |
40. 바라나시(1) (0) | 2016.02.19 |
34. 꼴까따(6)<도마뱀> (0) | 2016.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