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2016년 07월 09일 남한산성을 일주하였다.
남한산성은 우리민족사와 함께 해온 유서 깊은 산이다. 남한산성은 우리민족이 지나온 발자취를 알려주면서 또한 민족의 미래를 깨우쳐준다. 산성 발굴 터에서 백제의 유물이 나오고, 문헌상으로는 당과 맞섰던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이 지금의 남한산성의 시발이 되었고, 몽고의 침약 때에는 항쟁의 역사를 담았다. 한편 우리는 인조가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한 수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역사상 이 같은 굴욕의 역사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역사와 함께 하는 산성이지만 47일 동안 민족의 자존을 지키면서 항쟁의 불길을 지폈던 민족혼은 아직도 이 산성과 함께 생동하고 있다.
산성을 일주하면서 곳곳에서 벌어졌던 처절했던 저항의 모습들을 떠올려 보았다. 암문이라든가 장대라는 요새를 지날 때마다 열악한 조건에서 지혜를 짜서 물리적으로나 군사의 수적으로나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하였을 그 모습, 백두간척 위에 서있는 조국을 구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싸웠던 용사들의 악전고투의 모습이 그려졌고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남한산성은 둘레가 약 8km가 된다고 한다. 산성을 따라 오르고 내리는 길이 그리 험하지는 않지만 급경사를 오르고 내리는데는 주의를 기울여 하였다. 경사진 산길을 오르고 내리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남한산성은 건강한 등산객들이라면 하루 가볍게 등산하기 좋은 곳이 되리라 생각된다. 물론 우리 일행들이 모두 나이가 많기도 하지만 산세의 기복이 심하여 우리들의 등산코스로는 그리 녹록한 곳은 아니었다. 북문에서 동장대터까지 계속 오르는 길과 동문에서 남장대터까지 오르는 길이 힘들었다. 그리고 오르고 내리는 것에 지쳐서 자주자주 쉬어 가야 했다. 그래서 북문에서 10시 10분에 출발하여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아서 오후 2시 30분경에 다시 북문에 겨우 도착하였다.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남한산성의 의미도 크지만 남한산성의 자연경관은 참으로 뛰어나다. 나는 우리가 이런 아름답고 소중한 유산과 산하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남한 산성(南漢山城)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뿐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천연의 요새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다. 배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한 곳이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엔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주로 병자호란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조선 인조14년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왕자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식이 짙어지자 t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남한산성은 패배를 알지 못하는 곳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접근이 어렵고,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여 경작지와 물을 갖춘 천혜의 전략 요충지이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청나라 군사에 함락 당하지 않았고 47일이나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우여곡절을 가진 성의 역사처럼 성곽의 형태 또한 단순하지 않아서 하나의 괘곡선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이다.
인조 4년에 중아부의 가장 큰 괘곡선인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 한봉성 등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북문 성바깥 쪽
북문 성 안쪽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집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의해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전승문(全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엇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남한산성 순례는 10시 10분에 북문에서 출발지점인 동시에 종료지점이 되었다.
제1군포터
군포는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이다. 중정남한지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 현재는 한군데에도 남아 있지 않다. 조사 결과 이 군포지는 주변보다 약간 높은 평탄한 대지 위에 정면 3칸 측면1칸의 주춧돌이 발굴되고 다수의 와연과 조총 탄환이 나왔다. 군포는 목조기구로 된 건물에 기와를 얹고 토석벽을 두른 건물로 보이며, 초소건물 기능에 맞게 정면은 트여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서 온돌이나 난방용 시설은 홝인 되지 않았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제4암문(북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암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1km 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이 문은 뒷부분이 무지게 모양으로 반쯤 둥들게 만든 홍예문이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남한산성 여장(女墻)
女墻이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을 말한다. 남한산성 女墻은 다른 성곽에서 보기 힘든 전돌(塼乭)로 축조한 평여장이다. 그러나 축조시기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여장 재료는 일반적으로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塼乭로 사용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장은 수평되게 축조한 것이 기본형식이나, 급경사지에서는 계단식으로, 일부 완만한 경사지에는 지형에 따라 경사지게 조성한 예도 보인다. 여장에는 중앙에 근총안 1개와 좌우에 원총안2개 등 3개의 총안과 여장과 여장 사이에는 활을 쏘기 위한 타구 (垜口)가 마련되어 있고, 남한산성의 여장 규모는 길이 4.2m, 높이1.3m, 폭08m 내외가 일반적이다. <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동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 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동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동쪽에 있다하여 동장대라 불린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에 주둔하던 수어청에 소속된 5명 중 좌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동장대는 인조 2년 산성 수축시에 설치되었고 누각도 함게 건립되었으나 18세기 초에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주엽에 이르러 남장대와 서장대는 다시 수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봉웅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이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추정된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 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임문이 있는데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출입하던 곳이다. 본성과 연결부에 설치된 이 암문은 복이 1.3m 높이가 1.42m로서 다른 암문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다. 본성에 설치된 11개 대부분이 문 밖에서 보면 문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들게 만든 홍예문이지만 제6암문과 이 암문은 위부분이 ‘-’자로 만든 평거식문이다. 또한 다른 암문은 원성 축조시에 함게 만들어져 사전에 계획된 것인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웅성을 쌓으면서 신축한 암문으로 보인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장경사신지옹성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쌓는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그러나 남한산성의 옹성은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하고 요충지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로 다른 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장경사신지옹성은 한봉성과 봉암성에 대한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둘레가 159m이다. 옹성 끝에는 2개소의 포대가 설치되었고 포루의 좌측 벽에는 이방이라 불리는 무기나 화약을 저장하는 시설이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는 전투 시에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암문을 설치하였다. <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장경사(長慶寺)
경기도 문화재제 15호
인조 2년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승려 벽암각성을 파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하였다. 축성 후에도 승군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의 숙식을 위하여 인조 16년에 건립한 절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 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산성 내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10여개의 절이 세워졌는데 장경사가 창건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루(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었는데 그 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한 양식을 가지고 있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제1암문 (장경사 압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작고, 적에게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도 설치하지 않았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본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다른 암문들은 좌우측의 성벽을 돌출시켜 적의 고역에 대비하였는데,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을 돌출시키지 않았다. 전체적인 모양은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넓어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암문을 나가 제6암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송암정터(松岩亭址)
송암정은 우리말의 ‘솜바위정자’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한 사람이 갑자기 절병으로 뒤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 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바위에 서 있는 고사목(소나무)은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내부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 부른 소나무이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동문 사진이 없어졌네??? 안 찍었나???
동문(東門) 左翼門
남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동문은 성의 남동쪽에 위치하며,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이다. 조선 선조 때 보수하였고 인조2년에 다시 건립하였으며, 정조3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하였다. 이 때 성문마다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행궁을 중심으로 국왕이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 동문은 낮은 지대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제2남옹성치(第二南甕城雉)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 중의 하나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중 본성에 4개, 봉암성에 1개가 있다. 제2남옹성치는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남한산성에 설치된 치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남한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굴곡이 심하여 치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나 남족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이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남장대터[南將臺址]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군사적 목적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남한산성에는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곳은 남장대가 있던 곳으로 성 남쪽에 있다하여 남장대라 불린다.
남한산성 남장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의 외동장대를 포함하여 5개의 장대가 있다. 남한산성 본성은 수어청의 5명이 소속되어 수비하였다. 수어청의 5명의 진을 친 4개의 장대 중 유형문화재 제1호인 수어장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장대는 현재 터만 남아 있다.
남장대는 제2남웅성치 바로 안족에 있다. “중정남한지”에 따르면 남장대 위에는 ‘타우루’라는 문루가 있는데, 1788년(정조12)에 부윤 이태영이 pdnjT고 1802년(순조12)에 유수 김관주가 고쳐지었다고 한다. 남장대의 형태는 17세기에 제작된 남한산성도에는 단층누각으로 19세에 제작된 ‘광주부지도’에는 중층 누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남문
남한산성은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지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문을 통해서 들어왔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남문 문루
남문 (1892~1893) 사진 -- 경기도박물관소장 좌- 성외 우- 성내
남문은 정문에 해당되는 성문으로 남한산성 4개의 문중에 가장 크고 웅장하다. 이 문은 정조 3년(1779)에 기존의 성문 자리에 새로이 문루를 마련하면서 jdans 이름을 지화문(至和門)이라 명명하였다. 1892년~1893년 사이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남산성의 남문사진이다. 프랑뎅은 1892년 4월 조선 주재 제2대 프랑스 영사 및 전권공사의 신분으로 조선에 들어와 1894년 2월 프랑스로 돌아갈 때까지 외교관으로서 조선사람들을 만나고 서울과 주변의 산하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겼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수어장대
장대란 지휘간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장대로서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5개의 장대중 현조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이 사진은 1892~1893년 사이 이폴리트 프랑뎅(Hippolyte Frandin)이 찍은 수어장대으 모습으로 1900년 4월 14일부터 11월12일 까지 열린 파리만국박람회의 공식 엽서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우익문(서문) 사적 57호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하며 개구부와 문루로 구성되어 있다. 개구부는 내외 면이 반원형의 홍예문식이다. 외면 홍예 안쪽에는 두 짝의 목재 판문을 설치하였다. 판문의 문짝에는 방형 철엽을 서로 겹치도록 부착하였다. 대문을 지탱하는 문지두리는 석재로 위, 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고, 양측벽에는 장군목을 끼워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장방형 홈을 파놓았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와 송파 나루 방면에서 산상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상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에 개축하여 우익문이라 칭하였다.<출처 : 공원안내 표지판>
오후 2시 35분에 남한산성 술례를 마치고 북문[全勝門]에 돌아와서
(총 4시간 20분 소요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