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성(文殊山城)(2022. 03 .01)
요즘 내 일상에서 나쁜 버릇이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와 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생활습관으로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고 구건서가 고인이 된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어제 저녁에 이준호 교장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구건서 교장 수목장지를 참배하고 나서 문수산 산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밤에도 평소처럼 자정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준호교장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려고 6시에 일어나서 등산물품을 챙기고 서둘러 인천시청역으로 갔다.
오늘은 이른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곧 그쳤다. 오늘 우리 일정을 위해서는 다행이지만 요즘 너무 가믐이 들고 건조하여 비가 좀 더 내려주어야 한다.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드리워졌고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우리가 문수산에 도착할 무렵엔 안개가 걷혀 주기를 바라면서 집을 나섰다.
이준호 교장 김동식 교장을 인천시청역에서 8시30분에 만났다. 인천시청역에서 2호선을 타고 마전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강화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는 양곡과 통진을 거쳐 강화대교를 건너기 직전 성동 해병대 검문소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강화 대교 주위는 아직도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문수산을 등정하기 전에 고 구건서 유해가 묻힌 수목원을 찾았다.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우리는 고 구건서와 함께 산행을 하면서 보냈던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그의 진솔하고 겸손하며 배려심 깊은 후덕한 인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목원을 나왔다. <이준호, 김동식, 구건서, 김광수> 이렇게 4명은, 수년 간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높은 산을 산행하였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근래까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이라 구건서의 손명을 너무나 아프게 받아 들였다. 그래서 오늘 그의 3주기를 맞아 우리 3명은 그의 수목장 묘지를 찾아 참배한 것이었다.
나는 10여 년 전에 문수산에 여러 번 와 봤다.
그 때는 지금처럼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아서 산을 오르고 내리는데 힘든 곳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산성도 헐어진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등산로도 잘 정비해 놓고 등산객들의 편익을 위해 여러 가지 시설도 잘 설비 해 놓았다. 그리고 산성도 잘 복원하였고 정비에 많은 공을 들이는 모습이 보였다. 산성 복원은 관광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산성의 역사적 의의와 후손들에게 주는 교훈과 그 높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참 모습이어야 한다. 자칫 전시용으로, 한갓 관광용으로 문화재가 다뤄지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단체장들의 과욕으로 무리한 발굴과 개발로 오히려 원상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 과장되게 복원하여 역사가들의 빈축을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철저한 고증과 역사적 가치에 무게를 두고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게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문수산은 우리 역사의 깊은 한 자락을 간직한 곳이다. 문수산성은 숙종20년(1694년)에 축조하였고 순조 때 중수하였다. 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입에 맞서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병인양요 때 격전으로 해안 쪽의 성과 문루는 모두 파괴되었다.
프랑스군이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를 구실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여 조약체결을 요구했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앉자 군사행동을 개시하다가 조선군의 기습으로, 프랑스군은 많은 군사가 죽거나 다쳤다. 이에 프랑스군은 무차별 공격을 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입히고, 강화성을 점령하고, 관아를 습격하고, 많은 금은과 서적을 약탈하였다.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군사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철수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강도 높은 쇄국정책을 폈다. 한편 이 병인양요를 통해서 서방 세계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독립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다음 백과를 참조--)
수목원에서 등산로 입구에 있는 성동검문소 쪽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문수산 정상을 향하여 등정하였다.
문수산 정상을 향하여 오르기 직정, 좌측에 문수산 발치의 둔둑에 우뚝 선 희우루(남문)를 바라보았다. 남문(희우루)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하여 파괴되어 무사적 일부와 홍예석만 남아 있던 것을 홍예와 육축부(석축의 기단 부분)를 고치고 문루를 복원하였다.(‘남문’안내문 참조)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문수산 초입 이르렀을 때, 왼쪽 있는 희우루(남문)을 바라보았다. 희우루는 안개에 묻혀 희미한 그림자만 보였다, 그런데 하산했을 무렵은 안개와 구름이 싹 걷히고 남문 희우루 추녀 끝에 걸린 파란 하늘에 간간히 깃털구름이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며 날았다. 우리는 등산 시발지점에서 15여분 남짓 부지런히 가파른 솔밭길을 걸어 올라갔다. 드디어 첫번째 산마루 쉼터에 <문수산성의 門址>에 대한 안내문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성터를 따라 정상을 향하였다.
가파른 산길, 산등성이 따라 줄지어 쌓아올리 석벽을 따라 정상 봉우리의 장대(將臺)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였다. 북녘땅도 희미하게나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산 아래 흘러내리는 한강이 눈 아래서 도도히 서해로 흘러 가고 있다. 한강 바로 건너가 북한 땅이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입은 상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수산성이다. 지금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기지로서의 문수산성은 막중한 기능을 하고 있다. 장대(將臺)에서 바라보는 문수산의 산세는 빼어나고, 사방 경계가 참으로 아름다운 산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면서 무수한 시련의 역사를 목도했을 문수산, 그리고 현재 문수산 정상에서 바로 코앞에 다가선 북쪽 땅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언제까지 남과 북이 총부리를 맞대고 대치해야 할 것인지?
우리는 역사의 현장, 문수산을 내려오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연결 고리가 끈질기게 이어지는 속에서의 삶에 감사하였다.
*** 구건서는 나와는 인천고등학교에 같이 근무하면서 남달리 친하게 지냈으며 퇴직 후에는 함께 산행도 많이 하였고, 우리 두 사람은 중국과 일본에도 여러 차례 같이 여행을 하였다. 그런데 2019년 2월 마지막 주에, 구건서와 나는 [히말리야 랑탕 계곡 트레킹 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2월 28일 우리 일행은 <랑탕계곡 트레킹>을 모두 마치고 랑탕계곡의 가장 높이 위치한 여관(해발3800m)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헬리콥터를 타고 카투만두로 갈 예정이었다. 랑탕계곡의 마지막 날 밤, 구건서와 나는 같은 방에서 함께 보내던 중, 구건서가 자정을 넘긴 한 밤중에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그날 밤 그의 고통스러워하던 모습과 급박했던 그 상황이 너무나 생생하여 애통하다. 외부와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된 지역 히말라야 랑탕계곡의 마지막 마을의 한 여관에서 한밤중에. 참으로 답답하고 속수무책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구건서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히말라야에 가서, 거기서 그는 그의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고 구건서의 수목장지를 참배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수목장묘지를 돌아내려 와서 문수산을 오르는데 뒤에서 “광수 형! 하고 나를 부르는 구건서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환청>의 여운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구건서의 명복을 기원한다. 편히 잠 드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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