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2022.03.01 문수산성(文殊山城)

어르신네 2022. 3. 6. 22:53

문수산성(文殊山城)(2022. 03 .01)

 

문수산성(文殊山城) : 문수산성  강화도의 갑곶진을 마주보고 있는 문수산의 험준한 정상부에서 서쪽 산줄기를 따라 문수골과 산성포의 두 계곡을 감싸 안고 해안지대로 이어지는 산성이다. 조선 숙종20년 (1694)에 쌓았으며 처음에는 둘레 2,400m, 성가퀴 2173곳, 성문 3곳이 있었다. 이후 순조 12년 (1812)에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는데 성벽은 직사각형 또는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단단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몸을 숨길 수 있는 낮은 담인 성가퀴를 둘렀다. 성문은 공해루(控海樓), 희우루(喜雨樓) 등 문루 셋과 작은 출입문이 동문(東門), 아문(亞門)이 셋 있었는데 공해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어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하였다.  고종 3년(1866)의 병인 양요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하게 격전을 치른 곳으로, 이 싸움에서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文樓)가 모두 파괴되었다. 총 길이가 6123m인 성곽의 남은 구간은 4640m이고 없어진 구간은 1483m이다.  <출처 - 문수산 안내문>

 

 

요즘 내 일상에서 나쁜 버릇이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와 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생활습관으로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고 구건서가 고인이 된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어제 저녁에 이준호 교장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구건서 교장 수목장지를 참배하고 나서 문수산 산행을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밤에도 평소처럼 자정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지만, 이준호교장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려고 6시에 일어나서 등산물품을 챙기고 서둘러 인천시청역으로 갔다.

오늘은 이른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곧 그쳤다. 오늘 우리 일정을 위해서는 다행이지만 요즘 너무 가믐이 들고 건조하여 비가 좀 더 내려주어야 한다.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드리워졌고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우리가 문수산에 도착할 무렵엔 안개가 걷혀 주기를 바라면서 집을 나섰다.

이준호 교장 김동식 교장을 인천시청역에서 8시30분에 만났다. 인천시청역에서 2호선을 타고 마전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강화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는 양곡과 통진을 거쳐 강화대교를 건너기 직전 성동 해병대 검문소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강화 대교 주위는 아직도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문수산을 등정하기 전에 고 구건서 유해가 묻힌 수목원을 찾았다.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우리는 고 구건서와 함께 산행을 하면서 보냈던 시간들을 회상하면서 그의 진솔하고 겸손하며 배려심 깊은 후덕한 인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목원을 나왔다. <이준호, 김동식, 구건서, 김광수> 이렇게 4명은, 수년 간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높은 산을 산행하였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근래까지 가장 가깝게 지냈던 사이라 구건서의 손명을 너무나 아프게 받아 들였다. 그래서 오늘 그의 3주기를 맞아 우리 3명은 그의 수목장 묘지를 찾아 참배한 것이었다.

 

나는 10여 년 전에 문수산에 여러 번 와 봤다.

그 때는 지금처럼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아서 산을 오르고 내리는데 힘든 곳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산성도 헐어진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등산로도 잘 정비해 놓고 등산객들의 편익을 위해 여러 가지 시설도 잘 설비 해 놓았다. 그리고 산성도 잘 복원하였고 정비에 많은 공을 들이는 모습이 보였다. 산성 복원은 관광 목적으로 하는 것보다 산성의 역사적 의의와 후손들에게 주는 교훈과 그 높은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참 모습이어야 한다. 자칫 전시용으로, 한갓 관광용으로 문화재가 다뤄지는 일은 지양되어야 한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되면서 단체장들의 과욕으로 무리한 발굴과 개발로 오히려 원상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 과장되게 복원하여 역사가들의 빈축을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철저한 고증과 역사적 가치에 무게를 두고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게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존하여야 할 것이다.

 

문수산은 우리 역사의 깊은 한 자락을 간직한 곳이다. 문수산성은 숙종20년(1694년)에 축조하였고 순조 때 중수하였다. 188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입에 맞서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병인양요 때 격전으로 해안 쪽의 성과 문루는 모두 파괴되었다.

프랑스군이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를 구실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여 조약체결을 요구했으나 합의가 이뤄지지 앉자 군사행동을 개시하다가 조선군의 기습으로, 프랑스군은 많은 군사가 죽거나 다쳤다. 이에 프랑스군은 무차별 공격을 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입히고, 강화성을 점령하고, 관아를 습격하고, 많은 금은과 서적을 약탈하였다.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군사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철수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강도 높은 쇄국정책을 폈다. 한편 이 병인양요를 통해서 서방 세계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니라 자주독립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다음 백과를 참조--)

 

 

 

문수산성 오르는 입구(평화누리길 2코스)

수목원에서 등산로 입구에 있는 성동검문소 쪽으로 나온 우리 일행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문수산 정상을 향하여 등정하였다.

문수산 정상을 향하여 오르기 직정, 좌측에 문수산 발치의 둔둑에 우뚝 선 희우루(남문)를 바라보았다. 남문(희우루)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하여 파괴되어 무사적 일부와 홍예석만 남아 있던 것을 홍예와 육축부(석축의 기단 부분)를 고치고 문루를 복원하였다.(‘남문’안내문 참조)

 

희우루(남문)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 문수산 초입 이르렀을 때, 왼쪽 있는 희우루(남문)을 바라보았다. 희우루는 안개에 묻혀 희미한 그림자만 보였다, 그런데 하산했을 무렵은 안개와 구름이 싹 걷히고 남문 희우루 추녀 끝에 걸린 파란 하늘에 간간히 깃털구름이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며 날았다. 우리는 등산 시발지점에서 15여분 남짓 부지런히 가파른 솔밭길을 걸어 올라갔다. 드디어 첫번째 산마루 쉼터에 <문수산성의 門址>에 대한 안내문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성터를 따라 정상을 향하였다.

 

 

문수산성(文殊山城)의 문지(門址) : 문수산성에는 소규모의 출입 시설인 아문 네 군데를 포함하여 총 일곱 군데의 문터가 있다. 남문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하여 파괴되어 무사적 일부와 홍예석만 남아 있던 것을 홍예와 육축부(석축의 기단 부분)를 고치고 문루를 복원하였다. 북문은 깬돌을 이용하여 쌓은 벽면이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서문터는 발굴 조사 등을 통하여 기반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정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성격을 파악한 후 복원할 예정이다. 아문은 정상부에 동아문과 남아문 두 군데가 있으면, 서아문과 북아문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남아문은 성 안쪽은 사각형으로, 성 바깥쪽은 홍예식(무지개 모양)으로 장대석을 이용하여 세웠다. 동아문은 외면이 무너져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으나, 남아문과 같이 홍예식의 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lt;출처 - 문수산 안내문&gt;

 

 

문수산성의 성벽(城壁) :&nbsp;문수산의 성벽은 서벽을 제외하는 전체적인 윤곽이 확인된다. 북문에서 정상부로 향하는 지점에는 깬돌을 이용하여 세운 성벽이 13단까지 남아 있고, 정상부에서 남문 방향으로 암석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쌓았는데, 성벽 구간별 차이 또는 고쳐지은 시기별 차이를 보인다. 북문 쪽 성벽은 40~60cm 크기의 자연석과 깬돌을 수평을 맞추어 쌓았으며, 석재 사이의 틈에는 5~12cm 크기의 쐐기돌을 이용하였다. 남벽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2007년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기본적인 양상은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9~14단 높이250~300cm내외로 쌓은 것을 확인하였다. 성벽 곳곳에는 명문(銘文)이 남아있다. 명문에는 성벽 구간별 명칭과 그 구간 성벽 쌓기에 동원된 군대이름(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이 적혀있다. &lt;출처 - 문수산 안내문&gt;

 

가파른 산길, 산등성이 따라 줄지어 쌓아올리 석벽을 따라 정상 봉우리의 장대(將臺)에 도착하였다. 우리가 정상에 올랐을 때에는 안개가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였다. 북녘땅도 희미하게나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산 아래 흘러내리는 한강이 눈 아래서 도도히 서해로 흘러 가고 있다. 한강 바로 건너가 북한 땅이다.

 

 

문수산성 장대지(將臺址) : 해발 376m의 문수산에 있는 문수산성은 갑곶진과 더불어 강화입구를 지키기 위해 숙종 20년(1694년)에돌로 쌓은 산성으로, 고종3년(1866년)에 치른 병인양요의 전쟁터이기도 하였다. 이곳은 문수산 동쪽의 가장 높은 지대로 조선시대의 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지휘하던 장대지가 있었던 곳이다.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옛 지도를 보면 문수산성 남문(히우루 :喜雨樓), 서문{공해루: 控海樓} 북문 등 문루 3개와 바깥 통로인 아문 4개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가운데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은 전쟁 때 사라졌는데, 지도에는 공해루의 위쪽으로 성내의 시설물들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어 당시에 병영터였음을 알 수 있다..&lt;출처 - 문수산 안내문&gt;

 

삼국시대의 문수산 :&nbsp; 문수산성은 최근까지 강화의 갑곶진과 더불어 조강을 통한 외세침략을 막고 한양 일대를 수호하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2014년 고려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이미 삼국시대(신라)에 산성을 세웠음이 밝혀졌다. 삼국시대 성벽은 문수산의 꼭대기와 산등성이 높이의 8/10에서 9/10에 해당하는 부분을 따라 돌로 쌓은 태외식 산성(산의 봉우리를 둘러쌓아 만든 산성)으로, 길이는 약 300cm, 내부면적은 4631m&sup2;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주변에서 발견된 흙으로 만든 말 1점, &lsquo;찍은 무늬의 토기 조각&rsquo; 및 &lsquo;가로무늬, 문살무늬의 기와조각&rsquo; 등 7세기~9세기의 유물을 근거로 성벽을 쌓은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유물들이 계양산성, 동성산성, 수안산성 및 강화외성 등에 출토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문수산 또한 주변의 산성들과 같은 시기에 성곽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lt;출처 - 문수산 안내문&gt;

 

문수산성 장대(將臺) :&nbsp;문수산성 장대는 문수산 동쪽의 가장 높은 곳(고도376.1m에 있으면 서해와 한강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장수가 주변 정세를 파악하여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6.25전쟁 이후 군용 헬기장으로 사용하면서 유적의 원형이 크게 훼손 되었다. 2009년 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암반을 해체하고 발굴 조사한 결과 장대의 기단부 석렬(돌을 쌓아 올린 구조물)과 문터 한곳이 확인되었고, 다수의 기와조각과 도자기 조각, 철제 말과 도제(陶製) 말 등 21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2017년 김포시에서는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전체 면적 약 25.74m&sup2;의 장대를 복원하였고, 유적 아랫부분에 남아 있던 돌로 쌓은 부분과 별돌로 쌓은 부분을 정비하고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문수산성의 부속시설 :&nbsp; 문수산성은 문터 일곱 군데(남문 북문 서문 동아문 남아문 서아문 북아문)을 비롯해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감하고 취약점에 해당하는 곳에 성벽을 연결하여 설치한 용도 등의 시설을 갖추었으며, 돌로 쌓은 대규모 산성이다. 성 밖에는 서문인 공해루와 연결되는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경기도 기념물 제108호)가 있고 성 안에는 문수사( 文殊寺 경기도 전통 사찰 제62호)가 있다. 성안에 문수진, 무검정, 제승당, 남고(南庫), 내사(內舍), 진사(鎭舍), 전대동고(田大同庫), 마담(馬潭) 등의 군사 시설이 있었으며 남문의 동남쪽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확인 되지 않는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입은 상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수산성이다. 지금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기지로서의 문수산성은 막중한 기능을 하고 있다. 장대(將臺)에서 바라보는 문수산의 산세는 빼어나고, 사방 경계가 참으로 아름다운 산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면서 무수한 시련의 역사를 목도했을 문수산, 그리고 현재 문수산 정상에서 바로 코앞에 다가선 북쪽 땅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언제까지 남과 북이 총부리를 맞대고 대치해야 할 것인지?

장대(將臺)에서 바라보이는 북한땅&nbsp;

우리는 역사의 현장, 문수산을 내려오면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연결 고리가 끈질기게 이어지는 속에서의 삶에 감사하였다.

 

 

 

 

 

*** 구건서는 나와는 인천고등학교에 같이 근무하면서 남달리 친하게 지냈으며 퇴직 후에는 함께 산행도 많이 하였고, 우리 두 사람은 중국과 일본에도 여러 차례 같이 여행을 하였다. 그런데 2019년 2월 마지막 주에, 구건서와 나는 [히말리야 랑탕 계곡 트레킹 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2월 28일 우리 일행은 <랑탕계곡 트레킹>을 모두 마치고 랑탕계곡의 가장 높이 위치한 여관(해발3800m)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에 헬리콥터를 타고 카투만두로 갈 예정이었다. 랑탕계곡의 마지막 날 밤, 구건서와 나는 같은 방에서 함께 보내던 중, 구건서가 자정을 넘긴 한 밤중에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그날 밤 그의 고통스러워하던 모습과 급박했던 그 상황이 너무나 생생하여 애통하다. 외부와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된 지역 히말라야 랑탕계곡의 마지막 마을의 한 여관에서 한밤중에. 참으로 답답하고 속수무책으로 그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구건서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히말라야에 가서, 거기서 그는 그의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고 구건서의 수목장지를 참배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수목장묘지를 돌아내려 와서 문수산을 오르는데 뒤에서 “광수 형! 하고 나를 부르는 구건서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환청>의 여운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구건서의 명복을 기원한다. 편히 잠 드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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