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까따(Kolkata)
2006년 3월 11일(토) 흐림
푸리를 출발한 꼴까따(Kolkata)행 야간열차에서 새벽 4시경에 잠이 깨어 눈만 감고 누워 있었다. 출입구에 있는 칸이라서 문을 여닫는 소리와 문을 여닫을 때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8시 30분에 도착 예정이던 열차는 9시가 지나서 꼴까따의 하우라 역에 도착하였다.
삐끼가 다가와서 택시 타는 열에 서있는 나에게 자기 택시를 타라고 하였다. 귀찮아서 대답도 않고 다른 데를 보고 있으니까 자꾸 툭툭 치면서 싸고 빠르게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삐끼를 무시하고 열을 서서 택시를 잡았는데 삐끼가 택시기사에게 자기들끼리 지껄이고 갔다. 택시 미터기가 ?여 있기에 다시 꺾으라고 했더니 금방 꺾었다면서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러면 내려서 다른 택시 타겠다고 했더니 다시 꺾었다. 출발하면서 내가 운전사에게 나는 꼴까따에 세 번이나 왔었고 지리를 잘 안다고 하면서 슈더 스트리트까지 가자고 하였다. 슈터 스트리트에 와서 내가 보지도 않았는데 미터기를 세우면서 70루피라고 하여 아무 소리하지 않고 요금을 지불하였다.
네팔 아저씨는 여전히 김치볶음밥을 팔고 있었다. 아침을 거기서 해결하고 여관에 들어 있는 한국인을 찾아보았다. 서너 명의 한국인이 보였고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내일(12일)부터 출국하기 전까지 깔리가뜨에서 시간을 보내야겠다.
오후에 파라곤을 나왔다. 슈더 스트리트는 여전하였고 거지들과 인력거꾼들도 건재해 있었다. 시장도 돌아보니 작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파라곤에서 6개월간 기거하면서 테레사 하우스에서 봉사활동하시는 문 선생을 만났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 얼마나 힘들고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말만 들어도 존경스럽다. 작년에 아내와 함께 마더하우스에서 일주일을 보냈던 일을 생각하니 내일 까리가프에 갈 일이 끔찍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거기에 가서 삶의 어려움을 보아야 한다. 고통스런 삶이 어떤 것인지..... 나도 언젠가는 그런 이들과 같은 고통을 당할 터인데......... 이왕 왔으니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성심성의를 다하여 보자.
저녁에 네팔 인이 하는 간이식당에서 김치볶음밥을 먹고 여관에 들어와서 2층에 가봤더니 술 파티가 벌어졌다. 300루피를 썼다. 그들의 인도 여행은 1개월 내외이지만 장기간을 여행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 적은 돈이 아니다. 11경 내 방으로 내려왔다.
2006년 3월 12일 (일) 맑음
새벽 5시에 깨어서 5시 30분에 마더 테레사하우스의 성당으로 갔다.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사 후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각기 봉사활동 장소로 이동하였다.
나는 깔리가프로 갔다.
작년에 왔던 곳이라 낯익은 곳이지만 1년이 지나서 다시 병실을 들어서니 처음에는 좀 서먹서먹하였다. 글레고리 영감은 작년 이맘때처럼 여전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고, 스웨덴 출신 간호사 할머니도 작년의 모습 그대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작년 원장 수녀님은 보이지 않았고 동양계의 키가 작은 수녀님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책임 수녀님도 또 와 주어서 고맙다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깔리가뜨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2~3년을 계속하는 분들이 몇 명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환자들이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환자들이 점심시간에 서로 먼저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오늘은 빨래방 일을 도왔다. 점심식사 후 식기를 세척했다. 그리 힘든 일은 아닌데 어저께 밤늦도록 술을 마신데다가 밤잠을 설쳐서 몸이 무거웠다.
파라곤 여관에는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이 대부분이고 한국인들이 서너 명 있는 것 같다. 새벽에 테레사 수녀원으로 갈 때도 한국인은 나 하나였고 대부분 서양인, 일본인과 중국계 사람 들이 몇 명이 보였다.
그런데 낮에 슈더 스트리트에 나갔다가 한국인들을 여러 명 만났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부분 인도에서 장기간 여행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런데 한국인들을 보면 반갑고 얘기도 나누고 싶었지만, 내 나이를 생각해서 선 듯 젊은이들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한심하고 주책없는 노인으로 비춰질까봐 염려가 되었다.
오후에는 몸이 피곤하여 낮잠이라도 자려고 했더니 머리만 아프고 잠이 들지 않았다. 여행 막바지라서 긴장이 풀렸는가, 몸이 제 기능을 잃고 있는 것 같다. 맥주를 마시고 잠을 청하여도 허사였다.
동생에게 전화를 하고 인터넷을 한 시간하였다.
덥고 답답해도 팬(pan)이 만든 바람이 살갗에 닿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방안의 선풍기도 틀지 않았다. 감기 기운이 들어서 샤워도 하지 않고 아스피린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2006년 3월 13일(월) 구름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몸이 가볍다. 정말 다행이었다. 결리고 쑤시던 곳이 거짓말처럼 없어진 것 같았다. 어저께 저녁에 먹은 아스피린 두 개의 약효가 오늘 아침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인가. 여하간 새벽에 일어나니 잠을 제대로 잔 것 같고 머리도 맑으니 살맛이 났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5시 30분에 성당에 갔다. 어저께 산 슬리퍼가 말썽을 부렸다. 발가락에 상처가 나서 슬리퍼를 신고 다닐 수가 없어서 질질 끌고 다녔다.
미사를 마치고 깔리가프로 갔다. 환자들의 수발을 하기에는 내 힘이 부칠 것 같아서 오늘은 그릇 닦고 빨래하는 일을 도왔다.
빨래를 끝내고 좀 한가한 시간에 환자실로 들어가 보았다. 환자가운데 낯이 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한 환자는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자기 옆에 앉으라고 손짓을 하였다. 이들은 정이 그리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그걸 채워주기에는 조건들이 너무나 열악하다. 그런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 환자가 자기에게로 와달라고 손짓하여 갔더니 화장실을 가리켰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 스페인 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로 데리고 가는데 중간에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다. 사람이 마지막에 가까우면 그런 건가- 안타깝고 마음이 저렸다. 코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역하였지만 내색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인생의 황혼 길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마음이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오랜 기간을 이곳에서 봉사 활동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비자 만료 기간이 촉박하여 이번에 꼴까따에서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오후에는 집에 가져갈 선물을 샀다. 아내가 부탁한 화장품을 몇 개 샀는데 품질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냥 샀다. 가서 원망이나 핀잔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줄 견과류도 좀 샀다. 하여간 사긴 했는데 너무나 물건을 살 줄 몰라서 장사꾼들과 맛서는 것이 서툴러다 오늘도 얼마나 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2006년 3월 14일 (화) 맑음
오늘이 홀리 축제의 날이란다.
인도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홀리 축제(색의 축제)가 풀군(Phalgun)의 달(2월에서 3월 사이) 보름달(음력 2월 15일?)이 뜨는 날에 거행 되는 축제로서 2일간 인도 전역에서 행해진다. 홀리 축제 이외에도, 디왈리 축제와 두세라 축제도 인도 전역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이 축제의 기간 동안은 인도의 전역이 떠들썩하다.
홀리는 종교와 연관된 가장 세속적인 축제이기도 하다. 축제 기간 동안, 인도인 들은 제각기 색깔 있는 분가루로 분장하고 행사의 흥겨움을 더해주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홀리는 가장 오래된 축제이면서 선사시대 이후로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아리안들이나 비아리안이 종족들 역시 이 축제를 기념해 왔으며 실제로 이 축제는 수확과 새해를 상징하며 지나간 것에 대한 작별과 새로운 모든 것들에 대한 기원을 담고 있다.
---‘론리 플랫’에서 발췌---
어저께 저녁부터 얼굴과 옷에 물감 칠을 한 사람들이 보이더니, 오늘 아침에는 물감통을 들고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물감을 뿌리기도 하고 쫓아가서 얼굴에 강제로 칠을 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 사람들도 그렇게 당해서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 아침에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와서 깔리가뜨로 가는 버스를 오래도록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이 택시를 타고 가자고 해서 택시 한 대에 9명이 타고 갔다. 길을 가다보니까 걸어가는 사람들은 온전하게 갈 수가 없었다. 길가 여기저기에서 물감 물통을 들고 나온 사람이 행인들에게 물감을 뿌리고 물대포를 쏘기도 하였다.
홀리 축제일이라서 그런지 봉사활동 나온 사람들이 적었다. 일감이 많아서 힘든 하루였다. 빨래가 많아서 손이 부르트고 상처까지 났다.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아서 하는 사람들이라 능률이 올랐다. 오늘은 말만 하고 얼쩡거리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보았더니 길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깔리가뜨 앞거리는 온통 색물감으로 얼룩졌고 한 켠에서는 행인들에게 계속 물대포를 쏘아대고 소년들과 어린이들은 온 몸을 페인트로 칠하여 활보하였다.
오전 일이 끝날 무렵에는 깔리가뜨 병실 안에서도 남의 얼굴에 칠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한 바탕 소란을 피웠다. 서양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인도인들이 물감을 뿌리면서 노는 것이 즐거워 보였던 모양이다. 이탈리아 여인 한 명이 쉬는 시간에 밖에 나갔다가 인도인들이 뿌리는 물총을 맞고 온몸에 물감을 뒤집어쓰고 들어왔다. 이어서 다른 서양사람도 밖에 나갔다가 역시 물감을 뒤집어쓰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서양인 동양인 할 것 없이 그런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려고 나갔다가 모두 물감벼락을 맞았다.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다보면서 파안대소하고----- 나는 당하지 않으려고 옥상 꼭대기로 피해 있었다.
깔리가뜨에서 일을 마치고 여관으로 돌아올 때에도 길에서 우리가 지나가는 길을 막고 물감을 뿌리기도 하고 또 달려들어 얼굴에 칠하기도 하였는데 나는 용케 당하지 않았다. 더 걷다가는 계속 물감벼락을 맞을 것 같아서 모두 함께 택시를 타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슈더 스트리트에 들어섰더니 여기도 장안이 여간 아니었다. 여행자들도 모두 물감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인도의 젊은이들뿐 아니라 여행자들끼리도 서로에게 물감을 가지고 장난을 하였다. 인도 젊은이들은 여행자들을 일삼아 찾아다니면서 장난을 쳤다. 이 여관에 든 사람들은 대부분 물감칠을 당했다.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그리 좋은 풍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문화행사라고 보기가 어렵다. 어떤 해소거리로 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속히 버려야 할 나쁜 인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여관에 돌아오니 더 답답하여 밖에 나가고 싶은데 바깥의 분위기가 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 더 답답하다. 오늘은 여관 안에 한국 사람도 보이지 않아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고, 책을 보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외국어라도 능통하면 외국인들과 대화라도 나누겠는데 그것도 용이치 않으니 참으로 한심하였다.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는데 Bar는 문을 열어놓아서 맥주 한 병 사서 마셨다. 오늘은 네팔 사람도 나오지 않아 김치볶음밥을 못시켜먹고 좀 비싼 펀잡집에서 점심저녁을 해결했다.
요즈음 꼴까따의 날씨가 무덥지 않고 결딜 만한 좋은 날씨이다. 샤워를 할 때에는 약간 선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밤에는 팬을 끄고 잔다.
2006년 3월 15일 (수) 맑음
오랜만에 아침 체조를 하였다. 매일 체조를 해야 몸이 정상이 된ㄴ데, 하다가 말다하니 몸이 찌뿌드드하다. 체조를 지속적으로 해서 몸이 부드러워지도록 해야 한다.
오늘은 깔리가뜨에 가는 마지막 날이다. 무언가 잘못하고 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또 오게 되면 날짜를 넉넉하게 잡아서 봉사활동다운 봉사활동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밤에 뭄바이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하는데 오늘은 마음이 바빴다. 왜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고 철저하지도 못하면서....
저녁에는 여관에 남아있는 한국 젊은이들과 술이라도 같이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럼주를 사서 2층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같이 마셨다.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었다.
2006년 3월 16일 (목) 맑음
오늘은 마더데레사 하우스에서 모든 봉사활동을 쉬는 날이다. 새벽 미사에라도 참석하려고 했는데 배가 아프고 화장실에 앉아서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어 참석하지 못했다.
오전에는 침대에 누워 쉬다가 11시에 체크아웃하고 짐을 프런트에 맡겼다.
오후에는 시간을 보낼 요량으로 St Paul 성당으로 갔다. 성당 내부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오후 3시 이후라 하였다. 오후 3시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교회 넓은 뜰을 돌아보고 벤치에 앉아 쉬었다가 BBD쪽으로 걸었다. BBD로 가다가 먼지와 매연 때문에 숨이 막혀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시장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을 통해서 여관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맥주 두병을 사가지고 오는데 인력거 군이 내 팔을 붙잡고 인력거를 한번만 타 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맥주를 들고 있는 손이 부끄럽고 미안하였다. 여관 2층으로 가서 한국인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환담을 하였다.
하지 장애를 가진 젊은 여성이 내게로 와서 저녁 식사를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문 선생과 여인 5명과 함께 중국식당에 갔다. 그녀들은 맹렬한 여성들이다. 봉사활동 때 남보다 먼저 더 많이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을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게 중에는 종일(오전 오후) 깔리가뜨에서 환자들과 함께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영어도 잘 구사하여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술도 잘 마시고 끽연도 하였다. 모두 그들이 나누는 말로 봐서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 같은데.... 그런데 나는 아직도 고루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그들을 받아들이는데 한계를 느꼈다. 나에 대하여 그녀들이 어떻게 생각했기에 내가 귀국하는 날 저녁을 함께 하자고 한 것이지...... 아마 깔리가뜨에서 단 4일 간밖에 일을 함께 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 때문인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파라곤 여관으로 왔다. 8시 조금 지나서 짐을 점검하고 로비에서 시간을 보냈다. 미리 얘기해 둔 택시기사가 보이지 않아서 늦게 나타나면 곤란할 것 같아서 슈더 스트리트로 나가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예약해둔 택시기사가 나타나서
“당신을 태워주려고 다른 작업도 포기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왜 다른 택시를 타려고 하느냐?”
고 하였다. 나도 “당신이 보이지 않아서 초조했다.”고 했더니 머리를 극적이면서 내짐을 택시에 올렸다. 8시 40분에 하우라 역을 향하여 출발할 때 파라곤 여관에 있는 한국인들과 슈더 스트리트에 나와 있던 한국인들이 모두 와서 환송해 주었다. 고맙고 기뻤다.
하우라(Howrah) 역 8번 홈에서 웨이팅(waiting)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보니까 As1-15였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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